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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전씨 Jun 06. 2022

미국 오니까 서른이지만 스물입니다

시애틀살이 3개월 후기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되었다. 지난 3개월의 삶을 요약하자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무살로 돌아간 나날들”이었다. “스무살”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간단하다. 고등학생 신분에서 대학생으로 진입하던 때, 갑자기 유속이 달라져 삼각주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모래 한 알 같았던 그 때가 자꾸만 생각나서이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는 것은 공부를 한다는 책무의 영역은 일견 동일하지만 주변 환경과 약간의 사회적 기대만 바뀐다는 점에서 미국에 온 것과 비슷하다. 다른 언어를 써야 하고 전혀 다른 물리적 환경과 문화에 섞여들어가야 하기는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잘 해오던 일을 조금 변형하여 그대로 이어나가면 되니 내게는 그저 고등학생이다가 대학생이 된 정도의 일처럼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남들은 20살에 다 하고 털어낸 것들을 나는 30살이 된 이제서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밤 늦게까지 놀고 다음 날 일정을 막바지에야 취소한다든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고, 낯선 이의 집에서 기타를 배운다든지, 갑자기 미친듯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겠다고 등록하고 혼자 지겨워한다든지, 내일 걱정은 내일 한다든지… 내일 모레 걱정도 오늘부터 하는 데다가 술 먹고 수업 못 오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20살을 보냈는데, 역시 늦바람이 무서운 것 같다. 앞에 “무슨 이유에서인지”가 붙는 이유는 나도 도저히 내 행동들의 동기와 이 감정들의 기원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애틀

3개월 동안 느낀 시애틀은 딱 내가 원하던 한적함과 도시의 삶 그 중간 어딘가이다. 최근에 뉴욕에 사는 친구가 시애틀에 와서 몇 달 동안 같이 살게 되었다. 그는 시애틀에 도착하고 며칠 후부터 뉴욕에서 누릴 수 있는 폭발적인 선택폭과 문을 닫지 않는 가게들을 그리워했다. 이 도시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것인가도 같이 이야기 했는데, 그는 역시나 뉴욕을 선택했다.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나는 이제는 뉴욕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8년 전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뉴욕은 서울보다도 북적거리고 바쁜 도시이기 때문이다. 시애틀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심한 구석이 많은 곳이다. 널찍한 도로, 널찍한 보행로, 대개 넙적하고 키가 작은 건물들, 건물 만큼 많은 나무, 8시만 되면 문을 닫는 가게들, 조금 많은가 싶은 공원들… 저녁 9시에 난데없이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찾아올 때면 영 좌절스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 도시가 주는 여유로운 느낌에 나는 지금 아주 푹 빠졌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서울에서의 삶에 지쳤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늘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 도망가려고 해도 자꾸만 내 면전에서 습격해오는 불의 (예: 고개를 들 힘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면,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만나게 되는 반라의 여자가 담긴 성매매 찌라시), 언제나 불을 뿜어내는 온갖 종류의 주점들, 늘 화가 난 거리의 차들, 나를 자꾸만 서열 매기려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나의 신경전, 그러는 와중에 자꾸 깨닫게 되는 여러가지 격차…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립지만서도 이 모든 것들 속에서 다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문득 들기도 한다. 여기도 당연히 이런 많은 압박이 존재함을 다른 이들의 경험담을 통해 알고 있고 나 역시 여기서 사는 기간이 늘어날 수록 체감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이방인이니까”라는 훌륭한 핑계 속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 나에게 뭔가 안해도 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가 주어진 게 너무도 오랜만인데다가 그것이 주어졌던 시절에는 잘 활용하지 못했어서 이번에는 절절히 쓰며 살고 있달까.


일터

시애틀의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시내만큼은 정말 아마존의 도시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길 가다가 그냥 스타벅스가 있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더니 회사 내부 인터넷에 자동으로 연결될 때, 아마존 사무실들을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15분 단위로 운행되는 것을 볼 때 그렇게 느꼈다.


미국 사무실의 좋은 점을 꼽아보자. 1/ 일단 단독으로 건물을 한 채 다 쓰는 회사를 한국에서는 다녀본 적이 없어서 빌딩 출입 카드와 사원증을 둘 다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2/ 또 좋은 것은 사내 카페의 커피가 공짜라는 점이다. 나는 하루에 커피를 세 잔 씩 마시는데 이정도만 되어도 상당한 돈을 아낄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3/ 아마존은 시애틀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만큼 정말 많은 사무실이 있다. 정확히 몇 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본 것만 해도 10개 정도는 된다. 내 팀이 있는 건물이 아니어도 들어갈 수 있어서 다들 사무실을 어떻게 꾸며놓고 사는지, 어느 팀이 쓰는 오피스가 시설이 가장 좋은지, 어느 오피스 커피가 제일 맛있는지 탐방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4/ 그리고 회사 내에 구내식당이 있다. 구글처럼 무료로 식사를 주지는 않지만 꽤나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나는 한국과 동일한 잡 타이틀로 미국으로 옮겨왔는데 하는 일은 좀 달라졌다. 원래 AWS에 있다가 아마존으로 옮겨오다 보니 세부적으로 하는 일은 조금 달라졌다. 전보다 개발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하고, 신생 팀이다보니 새롭게 체계를 잡고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일도 많아서 아마존의 악명 높은 글쓰기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전에는 개발자들 구경도 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거의 개발자들이랑 밀착하여 일하고 있다. 솔루션즈 아키텍트는 직접 프로덕션 레벨 개발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개발자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지금 팀에서는 솔직히 이렇게 좀 더 일하면 다시 개발자로 옮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 언어 장벽. 나는 미국으로 옮겨 올 때 사실 언어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해외 팀원들이랑 일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어서 일을 하며 늘 영어를 써왔고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영어로 심심치 않게 발표도 계속해왔고 미팅도 많이 하고 여러가지로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로 옮겨 오고 나서는 꽤나 큰 장벽이 되었다. 일단 미국인들은 정말 말을 빨리 하고 정말 다양한 억양이 있어서 일단 물리적으로 듣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알아 듣는다고 해도 24시간 영어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생각을 정리하자니 훨씬 더 많은 인지적 에너지를 써서 하루가 끝나면 녹초가 된다. 게다가 지금 일을 하면서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 일도 많은데, 대학교에서 필수교양으로 영어 에세이를 죽도록 쓰게 하는 수업을 듣게 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마저 없었다면 나는 정말 밑바닥에서부터 영어로 논리적 글쓰기를 배웠어야 할 텐데,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2/ 문화적 차이. 사실 내가 지금 느끼는 약간의 혼란이 문화적인 차이인지 개인적인 업무 성향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될 것 같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고객 미팅 전 준비를 위한 내부 미팅이 있었다. 내가 리딩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완전 처음이라 멘토이자 매니저인 S에게 미팅에 참석해서 내가 하는 게 맞는지 좀 확인하고 내가 잘못하는 거 있으면 백업해줄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참석했다. 근데 미팅 내내 내가 “이거 맞는지 더블체크 해줄 수 있어?”,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묻는데 기분이 왠지 영 찝찝했다.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영 주니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마침 S와 1:1 미팅이 있어서 이런 내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가 “니 마음 이해하고 니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도와줄 건데, 나는 정말 전적으로 너를 신뢰하고 진심으로 니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 스스로를 더 믿어도 될 것 같아"라고 말했다. 괜히 창피해졌다. 나는 세상 독립적인 척했지만 사실 언제나 상사에게 확인받고 싶어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내가 주니어 버릇을 못 버려서인지, 아시아의 업무 문화가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것인지 등등은 사실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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