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와 채용 중단 시대의 빅테크 외국인 노동자, 절대 가오 살려
나는 천상 곰인척 나 스스로를 브랜딩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나는 도망을 잘 치고 고자질을 잘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끙끙 앓는 시점에 이미 나는 선생님이나 상사들에게 일러바치기를 모두 완료하기 일쑤이며 싫어하는 일에서는 어떻게든 도망쳤다. 근데 점점 나도 9년차가 되고 빼박 30대가 되면서 느끼는 점은,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이것 하나이다.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고를 치고서는 "책임을 통감하며 사임하겠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꽁무니를 빼는 정치인들처럼 내가 사라져주는 것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점 때문에 정치인이 부러울 정도이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도망가는 나 자신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커버렸다.
올해 4개월 동안은 내내 도망치고 싶었다. 1분기에는 나를 둘러 싼 불확실성 때문에 무너져만 내리다가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대량 해고가 진행되면서 내 주변 팀 동료들을 잃었고, 나의 영주권 진행도 중단되었고, 내가 맡아서 하던 고객사가 엎어지면서 원래 준비하던 승진 타임라인을 거절당했다. 내가 살던 집은 합법적 범위의 최대로 월세 인상을 요구했고, 나는 그것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서 이사를 나가야 했다. 다들 사무실로 돌아와서 일하라고 하는 마당에 우리 팀은 원래도 전원이 뿔뿔이 흩어져 일하는 팀이었으므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우리 어떻게 되는거냐"고 할 만한 동료도 없었다. 내 삶의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나는 미국에서 회사에 너무나 의존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회사가 준 미국행 티켓에는 이런 불확실성과 절대적인 갑을 관계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내가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을 그저 막막하게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에 더 애가 달았다.
미안하지만 자기연민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다. 하루 정도만 기분 나빠하고 우울해한 뒤에 그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야 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미국에 제발 가라고 등 떠민 적 없었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윗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서운하다면 그냥 창업하면 된다. 미국에 온 지난 1년은 정말로 허니문 기간이었고 새로운 모험에 들떠있어도 되었다면, 이제 올해부터는 생활의 건정성과 앞으로의 커리어,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될 내 가치관을 조금 더 다져나가야 한다. 그 한 해가 그저 조금 잔인하게도 해고 소식으로 시작했을 뿐인 것이다. 불확실한 신분과 이민자로서의 나를 마주하는 긴 여정의 시작이다.
2분기의 시작과 더불어 나는 사람들과 많이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짧은 영어로 정중하려 필사의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니가 하는 일 너무 구려, 이것 밖에 못해?"라는 말을 하며 그들의 일을 대신해야 했다. 너무나 못된 나 자신과, 자신 있게 내뱉은 말에 비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R&R 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주변 사람들, 이제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상대방... 교착 상태에 빠진 것 같은 지금은 예전 같았으면 딱 탈출 타이밍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가오가 안 사니까. 가오는 비싼 로고 박힌 옷으로는 살려지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꺾여지지 않는 눈빛, 꺾여도 다음 날 멈추지 않고 싸우러 올 것 같은 결기, 말로 뒤지게 패도 사라지지 않는 여유로움, 이래도 누구 하나 인생에 큰 일 나지 않는다는 대범함에서 나온다. 나는 정치인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금 내가 선택한 이 자리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은 자문하게 되는 이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낼 것이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과거의 나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1. 남이 정해준 프로젝트가 아닌 내가 찾아서 할 수 있는 일들로 한 해의 업무 계획을 세워서 매니저와 얘기하고 서포트 받아내기. 안 그래도 남한테 평가 받아야 하는 이 더러운 기업 체계에서 목표마저 내가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다면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2. 곳곳의 빵집을 찾아가기. 여전히 기분이 울적할 때 카페에 가지 않고서는 이겨낼 수 없다.
3. 괜히 벤치에 하염 없이 앉아있기
4. ... 추천 받겠음
4번까지 쓰고 글을 발행하려다가 문득 내가 도망가라고 조언해주었던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글을 읽고 혹시나 혼란스러울까봐 몇 문장을 더 남긴다. 얘들아, 너네는 도망가도 돼. 너네가 회사에서 3년을 꽉 채울 만큼은 너네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해야 해. 너희의 무지와 경험 없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너희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너희의 인간적으로 손상시켜. 그들과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하는 사람들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 내가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는 내가 도망가기 시작하면 너희를 괴롭히는 그런 인간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도달하기 너무나 쉬워지기 때문이야. 내가 만약 형체 없는 악의와 싸워야 한다면 지금이라도 나는 줄행랑을 칠거야. 그저 습관적으로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정도의 작은 다짐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