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상담심리대학원을 가게 되었을까-(2)

외국계은행후선부서는 어떤 곳이었나-

by 아곰

내가 사회초년생 시절인 2006년 2007년은 '아 예전같지 않네'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시기였다. 나는 사회생활이 처음이니까, '그 예전'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뭐가 그리 나빠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전에는 더 여유로운 분위기였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성인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스스로를 '회사원 아이'라 생각했고, 상사들을 어른들이라 생각하는 전체적인 정서가 있었다. 신입직원들은 가족의 막내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이 부서 저 부서를 돌아다니며 다른 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성격의 업무가 처음에는 주어졌다. 당장 일인분을 감당해야 요구당하고 그 대신 나는 회사의 일부가 아니야 나는 나야, 라는 요새 신입직원들과는 회사는 다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어 내가 그 일원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회사가 나에게 큰 역할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기대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처음에는 없다. 오히려 내가 회사에 의지하고, 배우고 있는데 돈도 받는다. 그나마 나에게 주어진 기대는 인사 잘하고, 업무지시를 잘 듣고 이해하고, 밥 사주면 잘 먹고, 이런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한데 정말 그랬다. 업무지식이 없고 회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가르쳐야만 하는 존재인 나에게 회사는 그나마 좋은 태도를 요구했고, 그 대가로 나는 박봉을 받았다. 당장 경제, 사회 지식을 그나마 활용할 수 있는 부서는 딜링룸 혹은 세일즈 정도인 것 같다. 특히 후선부서는 그들이 결제한 거래들이 제대로 수행되게 하는 것이 업무이기에, 회사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스템을 익히고, 시스템의 각 기능들을 담당하는 팀들을 익히고, 그들이 함께 돌아가는 작업구조를 익히기 전까지 신입직원들은 일정기간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팀원분들도 나를 '베이비'라고 불렀다. 밥을 잘 먹는다며 신기해하고, 간식을 챙겨주시고는 했었다. 나 또한 외국계은행의 정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당시 처음보는 고급 커피머신에 다양한 원두로 커피를 몇 잔이고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기한 간식들이 나의 존재를 반기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버리한 나에게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다가와주었고, 업무 시간에는 알 수 없었던 인간적인 면모들을 개방하며 내가 회사에 자리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정말 예전같지 않네, 라는 그 말은 진짜였다. 내가 그 후로 일했던 15여년의 기간동안, 업무환경은 팍팍해져만 갔다. 뭐 아침에 과일이 나오고 커피에 주스에 우유에 탄산수까지 꽉 차 있던 냉장고가 점점 더 비어가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회사는 직원들에게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경영방침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액이 오가는 투자은행 결제업무에서도 1원 차이는 큰 사고이기에, 그 실수가 일어나지 않게 일을 나누고, 여러 사람이 검열하게 했다. 그 과정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골똘히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행위 중 어떤 부분이 고쳐져야만 하는지 남들에게 발표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샅샅이 파헤쳐 기술팀에게 변화를 의뢰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아주 똑똑하게 잘못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나처럼 이 같은 변화를 나의 정체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 감수성파도 있는가 하면, 실용적으로 업무에 적응하며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긋는 적응형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낮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리 힘이 빠지고 신이 나지 않는지, 그리고 내가 느끼는 외로움을 나눌 동료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웃고 떠들고 밥도 먹지만, 그들도 회사에서 나와 함께 평가받는 자들이었다. 못 견딜 것 같다는 말을 나는 유도리있게 할 줄 몰라서 그냥 견디고 입을 닫는 편을 택했다.


언제부터인가, 입맛이 없고 항상 기진맥진 기절할 것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침에는 피곤해서 버스에 앉으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쉬어도 더 쉬고 싶고, 몸과 마음을 그렇게 더 쇠약해져갔다.


아, 정말 이러다가 기절하겠네, 싶던 나날이었다. 갑자기 부서장이 몇명을 사무실로 부르더니,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터졌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다른 사무실로 가서 분리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3주 정도면 다시 복귀할 거라고, 그 동안만 고생해달라고 한 것이 그때부터 2년이었다. 내가 광화문을 떠나, 경기도에 있다가 재택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체력이 바닥이었으나 출근을 하는 그 시간에 동네 뒷산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 푸르른 여린 잎이, 나뭇가지들이 짓이겨지고 작년의 낙엽들이 뭉근하게 뒤덮인 보드라운 흙바닥이, 지친 내 마음에 살포시 위로를 던졌다. 지금은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나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항상 컨디션이 바닥이었고, 무언가 해내야 하고 포기하면 나는 끝이라는 생각때문인지 나무들이 전해주는 그 여유를 알아듣지 못했다.


한적한 동네길을 거딜며 이제 일을 시작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나의 월급은 나의 희생의 값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창출해내는 경제적인 가치보다, 내가 견디고 참아야 하는 내 감정 그리고 하루종일 다른 것은 하지 못하게 사무실에 나를 붙들어 놓은 그 시간의 값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변화란, 삶의 큰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실험실같은 것이었다. 낑겨서 타는 전철 외에는 별 방도가 없는 삶이었다고 단정지었던 나에게, 매일 아침 40분의 산책시간은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기회비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삶의 다른 막, 장이 있다면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감히 먹지 못했던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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