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상담심리대학원을 가게 되었을까-(1)

방황과 고민의 역사의 시작을 트래킹하다보니? 나의 첫 구직이야기.

by 아곰

3년전만해도 나는 외국계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쩌다 나는 외국계은행에서 일하게 되었을까. '어쩌다'라는 말이 소용돌이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취직시켰다는 뉘앙스로 들리지만, 정말 결과적으로는 우연히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 같다.


나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취업을 대비해 이중전공으로 경영학도 공부했다. 2007년만해도 취업이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바늘구멍은 아니었다. 슬슬 문과대생의 취업문이 좁아지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아직 상경계열은 예외였다.


어영부영 보내던 학교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나는 '취업'이라는 것을 해내야 한다는, '아 나의 다음 임무는 이거여야 하는구나', 라는 압박을 느꼈다. 4학년 즈음, 주위 친구들은 크게 몇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1. 고시파: 행정고시, 사법고시 그리고 회계사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 늦어도 2학년 말에는 진로를 정해 고시반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에 들어가서 얼굴보기도 어려웠다. 이들은 공부에 시간의 대부분을 전념했고 취업은 이들에게는 합격과 동의어였기에, 무조건 합격이 이들의 당면과제였다.


2. 공부파: 자신의 전공을 더 깊이 연구하기로 마음 먹은 이들이다. 대부분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경우가 많다. 학부 때 처음 접한 전공에 벼락 맞듯이 내 운명이다, 느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부모님이 관련 학과의 학자인 경우 어린 시절부터 그들을 보며 나도 이 길로 가리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학준비든 국내대학원이든 고시파에 비해 이들은 좀 더 여유로워보였다. 자신의 소명을 이미 찾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3. 취업파: 기업에 취직하기로 결정한 이들이다. 취준생, 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지만 당시에는 취업은 오랜기간 준비하지 않고 때가 되면 준비를 하게 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 대기업, 은행 & 증권사, 외국계 컨설팅 그리고 각 분야에서 빛나는 회사들(로펌이나 외국계담배회사 등)에 지원하고, 공연기획이나 학원 같은 분야를 택한 친구들도 있었다.


진로를 결정하는 일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가고 싶은 회사를 생각하며 대학을 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뭘 할지 몰라 대학을 다니면서 생각해볼 참이었다. 초중고 시절 나는 대학을 가려고 살아왔다. 그 다음에는 뭔가 저절로 뭔진 모르지만 삶이 올바로(?) 흘러갈 것 같았다.


저절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암담했다. 내게는 반짝거리는 연구력도, 좌중을 휘어잡는 언변도, 인맥을 관리하는 사교계 인싸의 기질도 없었다. 정치에 대한 불만도 없고 의견도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로 대학생활을 시작해야했다. 캠퍼스를 걸어 교실로 가는 길에 언제나 마주치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옷을 입은 사람들, 동아리 부스에서 자신의 그룹을 홍보하는 이들을 보며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총천연색의 빛이 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대체 무슨 색인가 한탄한 적도 많았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학교방송의 아나운서 같은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매주 메이저 신문 못지 않은 필력을 가진 이들이 만든 학보를 읽으며,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자기의 쓰임이 있을까... 의아하고,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비슷한 고민을 하던 동기들과 가까워지며 조금은 나아졌다. 그러나 나의 자리가 생겼다는 안도감은 생겼지만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학생이 되면 나는 그 누군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나의 어떤 면이 사회의 인정을 받고 쓰일 수 있는지 스스로는 도저히 그걸 찾을 수 없었다. 학내에서 시도하는 공모전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미래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젊은이들은 모이라는데 뻗어나가고 싶지도, 뭘 그다지 해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열정부족은 바로 대기업들의 인적성검사에 포착이 되어 대표적인 대기업들의 면접전형은 경험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내가 인터뷰 기회를 얻었던 곳들은 외국계 컨설팅 회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누구가를 제치고 토론을 이끌어야 했고,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을 해야 했다. 나는 그런 역할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고, 면접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남은 기업들의 채용공고에 맞추어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부족한 시간이지만 나에 대해 쓸 거리를 자랑할 거리를 쥐어짜냈다. 계속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어렴풋하게 나는 어디 가져다 놓아도 대충 적응하고 살 인간이라고 그게 내 강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잘합니다, 라고 말할 거리는 없어도 '어떻게' 잘 적응은 하겠네요, 라는 게 나의 셀링 포인트였다.


그러나 이런 소재는 대기업의 자기소개서에 쓸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사에 간절히 들어오고 싶은 그 열정어린 마음 플러스 뭘해도 좋아라하는 젊은피를 원했지만, 나는 열정을 느낀 적이 많지 않은, 밍숭맹숭한 마음일 때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화장품은 좋아하는데 화장품 회사에 도무지 왜 들어가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어서 모니터 앞에서 멍을 때렸다. 치열한 서류 면접을 통과하면 면접을 보고 합숙을 한다는데 듣기만 해도 피곤했다. 그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그 행위를 하고 싶은 생각외에는 들지 않아 지원서를 띄워놓고, 하루하루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낮잠을 잤다. 하루해가 지는 걸 보면서 허무하기보다는 그냥 무감각했다.


그때였다. 예전에 인턴을 했던 Accenture의 과장님의 전화였다. 인턴을 다시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인턴 계약 중간에 정직원 모집일정이 있으니 일만 평타를 치면 채용에 가산점을 줄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3학년 방학기간동안 Accenture의 시중은행 프로젝트의 소비자응대절차를 수립하는 데에 말단으로 일을 했었다. 6시는 커녕 밤 10시에 집에 가서 약속 잡기도 어려웠던 나날들, 그 당시만해도 회식문화가 끈적끈적해서 다같이 먹고 마시고 노래방가고 피곤한데 탬버린도 흔들어야 하고... 출세를 향한 열정을 보이는 아부의 향연...


그러나 선택지가 없었다. 이 상태로라면 대기업공채시즌은 마무리되는 시기여서 내년을 노려야 하고, 심지어 내가 꼭~ 가고 싶은 회사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일단 가서 생각해보자는 특유의 허허실실, 자포자기, 혹은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핑권법?으로 프로젝트 사이트인 국내통신업체에 출근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회사는 그대로였다. 퇴근은 안하고 아침에 가서 간식먹고 점심먹고 간식먹고 저녁먹고... 나에 대해 더 알아가기는 커녕 내가 맞춰야 하는 요건만 늘어났다. 회의록 작성, ppt 취합, 사수와 팀장님 그리고 다른 인턴들과의 관계 등등... 3학년때 겪었던 괴로움이 생방송으로 다시 리플레이되며 아, 그랬었는데... 하는 현타의 순간을 맞이하고 옥상에 올라가 망연자실하게 겨울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울적했다.


그 순간, 대학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빡센 게 힘들면 온실속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말해주며, 외국계은행의 후선부서는 박봉이지만 임금이 금방 오르고, 업무가 깔끔하고 여자가 많아 오래 다니기 좋다는 소리였다. 그 당시 내가 증오하던 여러가지 끈적끈적 요소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조건들이었다. 박봉이야 뭐... 지금 버는 돈이 없는데, 박봉도 어쨋든 돈이지 않은가. 돈의 액수는 그 당시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대학동기 중 마침 도이치은행 서울지점에서 인턴을 했던 친구가 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추천을 해 주었고, 나는 동아줄을 잡은 기분으로 면접을 보고, 외국계 은행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인턴을 하고 있던 Accenture의 프로젝트에서 압구정에서 정자동으로 불시에 일터가 바뀌는 스트레스를 겪으며 철새살이에 학을 떼고 있던 와중이었다. 광화문의 오피스빌딩을 보며 감탄했고, 외국계금융기관들이 그렇듯 아늑한 사무실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 곳 한켠에 나의 자리를 얻어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당연지사였다.


나는 도이치은행 서울지점 기업금융쪽 후선부서에서 일하게 되었고, 인생의 숙제를 끝낸 기분에 감격하고, 후련해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알고 있었다. 숙제가 제대로 끝난 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쉴새없이 달리는 삶이 당연했던 나에게, 공백없이 어딘가에 다닐 곳에 생겼다는 것은 분명 큰 안도였다.


(외국계은행 경험에 대한 소회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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