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구절을 읽으며
김훈. 이름도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글도 그러하다. 연필로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다는 그의 글은 생각이 어지러운 나의 글을 진정시키고, 글을 쓰며 내가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소설보다는 비문학 혹은 산문을 많이 읽는데 동네도서관에 꽂혀 잘 보이지 않던 이 책이 김훈이라는 이름 때문에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스쳐지나가는 낙엽에도, 소복히 쌓인 눈에도, 삭막한 아스팔트 위의 아파트를 보면서도 고유의 생각을 할텐데, 그 생각이 자뭇 궁금해진다. 내 삶의 선망의 대상인 자신만의 마음을 내어보이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 그는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전문 작가이다.
Thomas Friedman은 기자이지만 사실만을 전달하지 않고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 개념처럼 자신의 종군기자경험에서 얻은 중동국가의 문화, 정체성을 녹여낸 뉴스를 전한다. 육하원칙에 따르면 뉴스들은 비슷하게 송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이터, 연합통신 등등. 하지만 그 사건이 개인적으로 획득한 지식과 경험과 함께 녹아들어 재구성된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몰랐던 진실에 눈뜨게 해주고, 생경했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며 더 크게는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김훈작가도 기자생활을 오래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글을 오랫동안 쓰며 단련하는 기간이 여느 작가에게나 있는 것 같고 그 또한 그랬다. 기자생활에서 작가로 전업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게다가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장편소설 즉 문학장르이다. 정수를 찌르는 간결한 문체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단어 하나하나가 쉽게 쓰여진 문장이 아님을 알기에 글을 읽으며 숙연해지고 그의 마음을 따라가며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한 듯한 충만함이 든다.
마음을 나누는 대화 후에는 항상 잔상이 남는다. 아마 마음이 오가는 과정에서 묻어두었던 나의 추억들이 건드려지기 때문인 것 같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의 후반부에는 그가 신문기자였을 때에 김지하의 출소를 기다리며 꽁꽁 언 한겨울에 구치소 밖에서 동동 거릴 때에 우연히 그의 장모인 고 박경리선생을 발견하고 그녀를 관찰하게 된 일화를 나눈다.
요새는 한겨울에 맨몸으로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여고시절 고3 선배들의 수능시험을 응원하기 위해 한 고사장 밖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러 밤을 지샌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짓이었지만 다들 그렇지 하고 내가 그래야 하는 상황이 와서 별 고민없이 합류했던 것 같다.
한두시간은 눈사람같이 중무장을 하고 가서 괜찮지만 추위가 뼛속을 파고든다는 말이 몇시간 후면 실감이 난다. 1980년은 패딩도 없고 경회루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한강이 얼만큼 겨울이 쩅하니 추웠던 때이니 김훈과 다른 기자들이 얼마나 취재를 위해 고생을 했는지 그 짧은 꼭지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들과 한겨울 어두운 구치소밖에 서있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아이를 낡은 이불에 싸서 업고 있었고, 솜으로 만든 신을 신기고 있었다고 써있다. 지금은 인형 만드는데에 넣는 그 솜이 그 당시 보온재였던 것이고, 그 솜신은 필시 아낙네들이 바느질로 만든 그런 솜신일 것이고, 한겨울 솜옷으로 아기인 손주를 업고 사위의 출소를 기다리던 박경리 선생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아기를 업은 그 무게가 아득하고, 또 착잡한 심경이 뒤섞인 어찌보면 초연한 심경이었으리라.
새벽에 김지하가 출소하고,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환대를 받고 바로 마련된 승용차를 타고 구치소를 떠난다. 먼발치 기다리고 있던 장모와 자신의 아이는 만나지 않고서.
이 지점이 나의 마음속 나의 외조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1920년대생이신 두 분은 이미 작고하셨다. 자손들에게 든든한 기둥이셨다가 노년에는 약해지신 모습으로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리고 부모의 쇠락을 옆에서 지켜보고 보좌하며 같이 몸도 마음도 무너졌던 엄마와 이모들이 떠오른다. 나의 부모들은 우리 세대는 조부모님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배려해주셨고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편 이제 부모님이 아프실 때에는 내 차례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외할머니는 항상 외할아버지와 나란히 걷지 않고, 뒤에서 따라다니셨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를 '조선의 여자'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후에 들었다. 그저 순종하고 미소를 지으시던 할머니는 명절에 장아찌와 김치녹두전을 많이도 준비해 놓으셨었다. 대충 하려는 마음이 없이 얼마나 김치를 정갈하게 썰고 꼬옥 짰는지, 참기름은 시골에서 공수한 꼬순내가 진동하는 녀석들로만 유리병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지막 방울까지 짜냈던 광경이 떠오른다. 막상 차리신 가족밥상에서 할머니는 함께 드시지 않고 항상 부엌 의자에 멀찍이 앉아 계셨었다. 남은 음식을 드시기도 해서 왜 그때는 그걸 말리지 못했는지 후회라는 감정이 마음 한켠에 아직도 있다.
그랬던 할머니가 80대가 지나 90대에 접어드시며 참아왔던 원망과 분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인지기능이 약해지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 화가 근거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1920년대생들에게는 참고 순종하고 가정의 부속품으로 살아야했던 것인 평범한 아낙들의 현실이었다. 남편의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했던 일도 흔했다. 그 당시 엄마들은 잠 잘 시간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 집안일을 했다고 들었다. 몸을 갈아서 가족들을 챙긴 강인한 여성들이었다.
누구나 삶의 고통이 있지만 세대별로 굳이 나누자면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겪은 괴로움의 수준은 지금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일제시대를 겪고, 6.25에 피난을 가고, 밑바닥부터 시작해 아이들을 기르고 학업을 마치게 하는 데에 숨돌릴 새도 없이 그들의 시간은 아줌마로 아저씨로,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새도, 그럴 생각도 못하시고 책임과 그 역할로만 사셨다.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가족과 헤어지고, 식량이 없어 배고픔을 두려워하는 삶을 우리는 모른다. 이념으로 사람이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 피부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피난 트럭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들, 북한에서 만주까지 걸어갔던 이야기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대에는 나름의 체념이 존재한다. 핵무기가 투하되면 피난갈 곳이 없고, 사실 그렇게까지 살기 위해 피난을 가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마음이 더 우세하다.
부모와 조부모와 대화가 통하지 않음은 삶의 기준과 방법 수준이 이토록 급박하게 변해왔던 사회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삶의 사건 뒤의 마음들을 나누는 일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아닐까. Nazi 치하에서도 모두가 학살과 차별에 동조하지 않았고, 다수의 물결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친구들을 도왔던 비유대인들이 있었다. 많이 소유하고, 남보다 나아지려는 큰 파도가 우리를 덮치는 지금, 나 자체로 인정받고 쓰임받고 싶은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찾으려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