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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Jan 22. 2024

소년 같은 파트너 변호사님

로펌 생활의 단비 같은 존재

 요즘 꾸준히 에세이를 쓰다 보니 글감을 발굴하거나 이미 생각해둔 글감에 맞는 일화를 떠올리기 위해 현재 일상은 물론이고 과거 기억들까지 탈탈 털어보게 된다. 아무래도 하루 중 가장 긴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직장에서의 일이다보니, 로펌 업무나 로펌에서 만나는 사람들 같은 로펌 변호사의 일상을 다루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기업자문팀 소속 변호사라 예컨대 (i) 송무 변호사처럼 누구 편을 들어 치열한 다툼을 하는 일화가 있다거나, (ii) 공익/인권 관련 업무를 하는 변호사처럼 통탄을 금할 수 없거나 가슴이 저려오게 만드는 일화가 있는 것도 아닌 터. 대기업, 외국계기업에서부터 중견,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기업들이 당면한 법률적 고충을 해결해주는 일을 주로 하다보니 에세이로 풀어낼 만한 소재를 발견해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팍팍한(?) 로펌 생활 중에도 단비처럼 다가오는 소재(?)가 있었으니, 바로 엄마뻘 되는 나이의 회사 외국법자문사(Foreign Legal Consultant, 외국변호사 자격 취득 후 원자격국에서 3년이상 법률사무 수행한 경력이 있는 법률전문가)님이시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캐나다인 파트너 변호사님*으로 경력이 20년이 넘으셨는데, 또래의 한국인 파트너변호사님들과는 사뭇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유쾌하고 장난기 넘치는 표정에 직급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스몰토크를 시전하신달까. 소년 같은 면모가 돋보이는 분이시다.


*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는 크게 구성원 변호사(파트너 변호사, Partner)와 소속 변호사(어쏘 변호사, Associate)로 나뉜다. 쉽게 말하면, 파트너 변호사는 주주이자 사용자로, 어쏘 변호사는 근로자로 생각하면 된다.


 여름날 하루는 변호사님께서 해외에 머무르시면서 한국 시각으로 새벽 2시 6분에 메일을 보내셨다. 급하게 회신을 요청하는 메일은 전혀 아니었지만, 마침 말똥말똥하게 깨어있던 나는 2시 30분에 답신을 했고, 2시 34분에 다른 어쏘 변호사님께서 나를 "fellow night owl(올빼미 동지)"로 칭하시며 답신을 보내셨다.


다른 어쏘 변호사님의 회신


그랬더니 2시 54분에 “둘 다 늦게까지 깨있다는 사실도 흥미롭군요. 주지하다시피 그러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은데 말이죠! 어쨌거나 둘 다 고맙고, 얼른 주무세요.(Also interesting that you are both up so late - this is bad for your health you know! Anyway, thanks both, and you should go to sleep now,)”라는 답장이 왔다.


파트너 변호사님의 회신


 우리는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세 시가 다 되어 온 파트너 변호사님의 답신도 바로 읽었고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잠이 든, 그날만큼은 진정한 올빼미였지만 말이다.


 파트너 변호사님은 오전 10시가 넘어 새로 메일을 보내셨다. 그런데 첫 문단을 보자마자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앞서의 건강상 조언과 관련해서 참고로 말하는 건데, 늦게까지 깨있는 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는 걸 방금 알게 됐네요. 어쨌든 저는 늦게까지 깨있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긴 합니다만.(So just for your information regarding that health advice, I just heard this and you can probably find opposing advice saying that staying up late is no problem.  Anyway, I believe the former to be true.)”


어쏘들의 건강을 걱정해주시는 따수운 파트너 변호사님


 상황을 글로 옮기다 보니, 그리고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다 보니 내가 느낀 웃음 포인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아쉽지만……, 변호사님이 보내오신 메일 전체를 보면 내가 캡처한 부분 외에는 온통 진지한 업무 얘기 뿐이라, 어쏘 변호사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을 메일 앞부분에 떡하니, 그것도 새벽의 걱정과 연결되게 써놓으신 게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참 재밌었다.


 또 이 일은 한국계 캐나다인 파트너 변호사님, 한국인 파트너 변호사님, 다른 어쏘 변호사님, 나까지 넷이 하는 일이었는데, 새벽부터 오전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메일에 내내 참조로 들어가 있으시던 한국인 파트너 변호사님은 이 메일에도 그렇고, 평소에도 그렇고 항상 이 캐나다인 변호사님의 말랑말랑한 농담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11시에 회의실에서 보시죠"와 같은 딱딱한 답신으로 일관하신다는 것도 웃음 포인트다(메일로만 그러할 뿐 사이는 좋으시다).


 파트너 변호사라면 엄격 근엄 진지해야 할 것만 같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캐나다인 변호사님이 아무리 유쾌하고 장난스럽게 농담을 해도, 그 고정관념에 한껏 충실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한국인 변호사님의 반응까지(하지만 한국인 파트너 변호사님도 판에 박힌 느낌이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캐릭터가 있으신 분이다. 이 분들을 데려다놓을 수도 없고……,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림 자체가 웃기다.






 이 파트너 변호사님은 한국에서의 업력만 20년이 넘으셨다. 즉 한국에 사신 게 20년이 넘어간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내게는 늘 영어로만 말을 하셔서 한국어는 전혀 못하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듣고보니 한국어 리스닝은 어느 정도 가능하시고, 스피킹도 대화가 통하는 수준으로는 가능하신 것 같았다. 영어업무를 하는 변호사들 앞에서만 영어에 비해 부족한 한국어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영어업무를 하고는 있지만 한국 변호사다보니 한국어 서면/메일로 쓴 내용에 상응하는 법률영어 표현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변호사님과의 대화 중에 애를 먹었던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진작에 한국어도 알아듣는다고 해주시지!’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이후로는 오히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할 때의 버벅거림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에는 오히려 더 부담 없이 업무상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신이 초안을 쓰면서 지나치게 꾀를 부린 것 같다는 취지로 말씀하시면서 귀엽게(?) “(나) 오바(한 것 같아)”라는 한국어 표현을 덧붙이셨다.


 긴 연휴가 끝나고 수요일부터 다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오늘 점심 때 내가 참조인으로 표시된 메일을 눌러보고 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연휴 잘 보냈길 바랍니다… 이제는 끝나버렸지만…(I hope you had a nice holiday… now in the past…)” 말줄임표에 담긴 변호사님의 절망감이 내게까지 전해져 오는 듯해서, 아아니, 내 절망감과 공명하는 듯해서 순간 할말을 잃었다. 곧이어 이 메일의 수신인인 또 다른 어쏘 변호사님도 앞서의 근엄한 파트너 변호사님과 똑같이 이 문구에 대해 일언반구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러나 정중함을 잃지는 않은) 답신을 보내셨기에 또 웃음이 나왔다.



 일을 시작한 지 고작 6개월차고 변호사 수습기간이 막 끝나가는 가을이지만, 막상 계속 변호사로 살아가면서 후배에게 이만큼의 여유와 위트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벌써부터 든다. 앞으로 이 파트너 변호사님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가끔 다시 읽어보면서 연차와 경력이 쌓이면서도 실력뿐만 아니라 내가 견지하고 싶은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잊지 않고 가꿀 수 있도록 해야지.


(2023년 가을에 쓰다)








* 변호사로 일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쓴 글이다. 파트너 변호사님과는 글을 쓰기 전후로 계속 일을 함께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늘 좋은 분이라 느낀다. 10년쯤 뒤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단 한 명의 후배 변호사에게서라도 일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좋은 선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면 참 좋겠다. 아래의 변호사님 말씀처럼 직장에서의 하루하루를 멋진 집을 짓기 위한 벽돌 쌓기라 생각하며, 매일의 벽돌 쌓기에 집중해야겠다!


변호사님께서 보내주신 감동적인 메일의 일부인데, 위 글을 쓸 당시에 첨부하는 것을 빼먹었다.




점점 짐이 늘어가는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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