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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Feb 16. 2024

“훈련 말고 데이트”

데이트 대신 운동에 빠져버린 한 커플 이야기

지난여름 크로스핏을 하다가 남자친구와 소위 말해 눈이 맞았다(!). 내가 다니는 박스는 지점이 세 군데인데, 남자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지점에 다니고 있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지점에서 우리 지점으로 소속을 옮긴 코치님을 뵈러 주말 수업에 놀러왔다가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아무쪼록 남자친구 덕분에 남자친구가 다니는 지점 회원님들끼리 주기적으로 모이는 배드민턴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번 모임 장소는 5호선 서쪽 끝 김포공항역을 지나서였다. 오호라! 그 근처에는 러닝 코스로 제격인 마곡식물원도 있고 강서한강공원도 있잖아? 사귄 지 3개월 차, 장거리 러닝에 심취해 있던 우리 커플은 저녁 7시에 배드민턴 모임에 나갔다가 9시에 러닝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희는 러닝을 하러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자친구네 지점 회원님들은 다들 친절하고 쾌활하셨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함께 담소를 나누며 편하게 배드민턴을 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뵙는 그 분들은 평소 남자친구에게서 익히 들어, 당시 불타오르던 우리의 러닝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운동인이 운동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크로스핏에 더해 배드민턴까지 즐기는 분들이었기에 우리가 먼저 코트를 떠나 러닝이라는 다른 운동으로 외도(?)하러 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며 흔쾌히 보내주셨다.


쩝, 그날 코트를 정리하고서 칼국수에 파전, 막걸리를 먹으러 가셨다고 하는데....... 그 최고의 조합을 포기한 우리 커플은 격한 유산소 운동 끝에 마곡식 물원에서 시작해 한강을 따라 10km 러닝을 더하고서야 흡족한 마음으로 저녁 데이트를 마쳤다.




하루를 건너뛰고서 돌아온 주말, 오전에 다른 박스에 드랍인(drop-in)을 갔다. 오전 11시 수업에서 모처럼 역도 위주 와드를 해치운 우리가 향한 곳은 한강. 그날도 10km를 뛰는 것이 목표였다. 맨몸도 아니고, 리프팅 벨트, 체조용 손목 스트랩, 역도화를 가방에 욱여넣고 가방을 맨 채로 뛰는 거였다. 막 한강공원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정오를 넘은 시각이었다. 쨍쨍한 햇볕을 맞으며 가방을 메고 러닝을 하려니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드랍인을 갔다가 바로 10km를 뛰자는 제안은 내가 한 건데,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햇볕이 따갑다며 투덜, 가방이 무겁다며 투덜, 늦잠을 자서 11시 수업도 헐레 벌떡 오느라 공복이라 투덜, 역도할 때 하체를 많이 써서 그런지 다리가 아프다 고 투덜. 100m를 뛰기가 무섭게 투덜, 투덜, 투덜, 투덜하다가는 결국 투덜댈 기력도 없어 입을 닫고 달리는 내 옆을 남자친구가 지켜줬다. 긍정적인 기운을 가득 품고.


이왕 하기로 한 거 조금만 더 가보자!
날씨도 맑고 해가 쨍쨍해서 나도 에너지가 생기는데?


조금만 더 긍정적이었다면 힘든 마음을 왜 이해해주지 못하냐며 짜증을 낼 뻔 했는데, '아주 적당히' 긍정적인 남자친구 덕분에 힘을 내서 결국 5km를 채웠다. 계획했던 10km를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시 컨디션으로는 최선이었기에 그날도 뿌듯한 마음으로 훈련을 마쳤다.


연예인 중 웨이트트레이닝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종국이 그랬던가, "먹는 것까지가 운동이다"라고. 먹는 것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그날의 데이트를 마무리한 우리였다.




이후 우리는 두 차례 여행을 다녀왔는데, 크로스핏 박스는 대개 일요일이 휴무이므로 일요일에는 등산을 가거나 안타깝게도 운동을 쉬었다. 일요일을 빼면 하루에 현지 박스 한두 군데를 들러 크로스핏을 했다. (해변 러닝이라든지 현지에서 유명한 러닝 코스를 따라 러닝까지 했다면 더 완벽한 여행 일정이었을 터다.)


<부산 여행> - 꺾쇠(「」) 안은 박스 이름
* 토요일 : 「웨스트코스트 트레이닝」
* 일요일 : 한라산 등반
* 월요일 : 「크로스핏 글라」


<제주도 여행>
* 금요일 : 오전 6시 32분 KTX로 부산 출발
오전 10시 30분 「팀케이 크로스핏」
오후 5시 「크로스핏 레인드랍」
* 토요일 : 오후 1시 「커넥션」
* 일요일 : (운동 쉬어가기)
* 월요일 : 오전 11시 「크로스핏 온오프짐 일광」




우리 커플이 말 그대로 아주 건실하게 만남을 이어온 지도 몇 개월이 더 지나, 반 년 만에 배드민턴을 함께 쳤던 J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리보다 열 살 정도가 많은 30대 후반의 여자 회원님이었는데,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시는 것이었다.


쌤들은 훈련 말고 데이트를 좀 하세요!
부산도 제주도도 말이 여행이지,
사실 전지훈련 다녀온 거 아녜요?


듣고 보니 그랬다. 알고 보니 우리는 "부산 여행전지훈련"과 "제주도 여행전지 훈련"을 다녀온 것이었다. 평소 함께 데이트했던 시간들도 떠올려보니, 말이 데이트지 사실은 "테이트훈련"을 함께 한 것이었나 하는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한 가지 머릿속에 생생히 스쳐 가는 장면이 있다. 여의나루역 둔치에서 밤도깨비 야시장이 열린 때였다. 핫도그며, 파전이며, 온갖 음식들을 파는 푸드트럭과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연인들과 친구들. 그 앞에서 우리는 비장한 얼굴로 러닝화 끈을 고쳐매고 러닝을 시작했다. 마곡대교까지 밤공기를 맡으며 쭉 달렸다가 다시 여의나루역으로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먹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여의나루의 장면을 비롯해 열정 가득했던 데이트훈련 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운동에 대한 미친 열정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 남자친구는 웨이트로 전향해서 혼자 운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크로스 핏 박스를 다니고 있다. 그 뒤로 J쌤을 뵙지는 못했지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J쌤, 덕분에 이제 훈련 안 하고 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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