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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Feb 23. 2024

촌철살인 그리고 임기응변

― 지원아 너 되게 급해 보여. 어딘지 모르게.


퇴근 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모처럼 곳곳을 누비며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S가 문득 던져온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매사에 나처럼 허둥지둥 급한 법이 없이 느긋한 S는 종종 뜬금없는 타이밍에 툭, 촌철살인의 문장들을 내뱉곤 한다. 생김새도 말투도 순둥순둥하기 그지없는 S지만 그럴 때 던지는 말은 꽤나 정확하고 날카로워 헉, 하게 만들 때가 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내가 급해 보인다니.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2023년 초까지만 해도 수험생 신분이었다. 내게 수험생활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건 ‘나를 나답게 느끼도록 해주는 일’–이를테면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할 때마다 ‘지금 이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수험에서 생활에서 공부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도려내고 성적이라는 결과로 노력을 증명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니, 공부 외의 일과는 그게 무엇이든 그야말로 ‘사치’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수험생활을 마치고 그간 못다한 사치와 여유를 좀 부려보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급해 보인다니 웬 말인가!


「난 지금 평일 저녁에 서점 둘러보는 직장인인데? 지금 내가 이보다 더 여유로울 수 있을까 싶다고! 근 몇 년간은 늘 종종거리며 지내왔지만, 올해는 달라. 올해는 내 인생에서 제일 여유롭고 또 평화로운 시기란 말이야. 지금의 날더러 급해 보인다니, 너 만약 올해가 아닌 작년에 날 봤더라면 식겁했겠다?」


와다다, 억울한 마음을 잔뜩 쏟아내려고 뒤를 돌자 멈춰진 내 발걸음을 따라 책장 사이에 멈춰서서는 말간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S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헤실헤실 속없이 웃는 S의 표정에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너를 보면 내가 성격이 좀 급한 것 같긴 하다. 너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에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겠어. 너가 나더러 급해 보인다니 그럼 내가 급한 거지 뭐.」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속도가 머릿속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말을 주워 담아 꿀꺽 삼켰고, 대신 짧게 반문했다.


― 응?

― 너, 급해 보인다고. 그리고 지원아, 너는 생각도 참 많아 보여.


S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그 짧은 새에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생각들에 대해 ‘생각’해보니, S가 덧붙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 나는 생각이 많아. 샤워를 할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 발산하기도 수렴하기도 하는 내 생각들은 가끔은 그물을 닮은 격자 모양의 노트를 거쳐 글로 나오기도 하고, 대부분은 수챗구멍으로 비눗물이 빠지듯 그저 흘러가곤 하지. 근데, 그래서 뭐?」


이번에도 ‘많은 생각’들은 머릿속에 떠다니도록 둔 채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근데, 그래서 뭐?」만큼은 표정으로 그대로 옮긴 채로 S를 쳐다보았다. S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어갔다.


― 그래서, 나는 좋다고. 항상 재빨라서, 또 생각이 많은 만큼 깊어서*.


천진한 얼굴로 꺼낸 S의 말에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생각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 머리가 멍해졌고, 내 입가에는 이윽고 미소가 슬며시 피어났다. 그날도 그렇게, 휘적휘적 서가를 배회하다 생각에 잠기다를 반복하는, 급하고 생각 많은 나다운 나의 곁을 지켜주는 S였다.


* 지금 생각하니 이 대답은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내 마음을 눈치챈 S가 계획에 없이 그저 임기응변만으로 일구어낸 최고의 답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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