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아들에게 자꾸만 화가 났다.
아들이 특별히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때로 요란스럽게 굴기도 하고, 내 제안에 대해 곧잘 "싫어"하며 제 의견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과 함께한 지난 십 년의 세월 동안 늘상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지난주부터 아들의 행동이 하나하나 눈에 거슬렸다. 아들의 말투며, 내게 보이는 반응들이 그토록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들도 나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뭔가 말을 하려 들면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도리어 큰소리였고, 그 마저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면 건성으로 "어, 어" 하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시작이 아들로부터 였는지, 나로부터 였는지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만큼이나 분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감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그런 반응 앞에 나는 한없이 서운했다.
그리고 서러웠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말이 혀 끝에서 맴돌았다. 기어이 꾹꾹 눌러 삼키지만 어느새 눈에 눈물이 송글 맺혔다.
그랬다. 내가 지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이 다 지를 그토록이나 사랑해서 나온 것들인데... 그런데 그걸 이렇게 매몰차게 밀어내다니...
그러나 나도 알고 있었다.
나의 이런 감정은 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나는 감정을 꾸욱 눌러서 가슴에 담고, 최대한 아들에게 무심히 대하려 노력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누르자, 긍정적인 감정 즉 사랑과 다정스러움도 함께 눌렸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아들에게 조금은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오늘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대신 걷기를 선택했다. 내 속에 뒤엉켜 있는 이 감정을 풀어보기 위해서 홀로 걷기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적어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내 시간이니까. 그리고 그제서야, 주말 동안 나를 괴롭히던 그 문제를 꺼내 놓을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학기가 새로 시작되었을 때,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이제 정말 프랑스인들 사이를 파고들어야만 하는 미션을 지닌 아들은 마치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보려 애쓰는 어리고 약한 새 같았다. 학교에 나가 있는 시간이 고될수록, 집에 돌아온 아들은 더욱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아들은 곧잘 내 품에 안겨 '엄마 거기 있지? 나 혼자 아니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했다.
그런 아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나는 아들에게 마음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그 편지를 읽은 아들은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에겐 엄마뿐이야,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하는 표정으로 내 품에 안기곤 했다.
그건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랬다. 표면적으로는 아들이 잘 적응하길 바랐기에 늘 걱정이 떠나지 않았지만, 아들을 둘러싼 상황이 요동하고 그래서 아들이 더 나를 의지하고 나를 찾는다는 사실은 나에겐 기쁨이었다. 내가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다짐이 넘쳐나는 날들이었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내가 해 주리라는 그 간절함이 내 속에 가득 찼다.
그러나 문제는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아들이 학교에 너무나 잘 적응해 나가면서 발생했다.
아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잘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하는 활동들을 통해서 작은 성취감을 누리기 시작했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와 아들이 삐걱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은 엄마에게 잔소리를 그만하라 소리치고,
엄마는 아들에게 태도가 그게 뭐냐고 나무라며...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스스로의 삶이 만족스러워진 아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들떠 있었다. 그런 아들이 우려스러워 몇 마디를 할라치면 아들은 듣고 싶어 하질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원함과 한계도 분명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단단해져갈 수록 더 이상 '엄마'하며 품을 파고들지도 않았다.
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중심에는 더 이상 '내'가 없었다.
그랬다. 아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나갈수록, 그리고 아들의 세계가 확장될수록 아들 마음속에서 내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던가.
그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 감정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랬다. 결국 내가 그토록 참을 수 없이 서운하고 화가 났던 것은, 아들이 더 이상 그전처럼 나를 원하지 않고, 그전처럼 내 품을 파고들지 않고, 내 말과 행동이 아들에게 전처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바라고,
나를 의지하며,
내 품을 파고들던 아들이
어깨를 펴고,
나로부터 멀어지며,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나는 그 상황이 마치
내가 부인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다.
나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이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마음껏 모험하고, 마음껏 실패하고, 실수하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아내길 바란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아들이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옆에서.
그리고 아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범위 내에서.
마음껏 모험하되 내가 걱정하지 않는 선에서 하고, 마음껏 실패하되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선에서 하고
실수하되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길 바랐지만
그것에서 내가 빠져있길 바라지는 않았다.
결코 내가 허락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지 않기를, 나는 바랬나 보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를 위한 사랑인가,
아들을 위한 사랑인가.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 비로소 눈물이 난다.
나는 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나보다도 작고 어린 한 아이에게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려던 그 힘겨운 몸짓을 내려놓는다.
내가 너에게만큼은 중요한 존재이길 바라는 마음, 너만큼은 나를 언제나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 내가 너에게 그러하듯...
그 욕심을 애써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씌우려 했던 그 한계를, 내 마음의 한계를, 힘겹게 거둬들인다.
멀리 날아가 보렴.
설령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해도,
내가 너를 응원할 테니.
네가 원하는 만큼 행복해 보렴.
설령 네가 나를 잠시 잊는다고 해도,
나는 늘 여기에 있을 테니.
마음껏 실수하고 실패하고
그리고 많은 성공도 누려보렴.
설령 네가 이룬 그 세계 속에 내가 빠져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네 엄마일 테니.
그러니 나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가 보렴. 너의 길을.
내가 지운 한계를 넘어서서 너의 세계까지.
그걸 응원해주는 것이야 말로,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진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