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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Aug 28. 2024

남편을 질투했다

그런 내가 중산층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전문직 부모님 밑에서 자란 서울토박이였다. 직장에서 만난 우리는 첫눈에 반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사실 연애를 할 때는 남편에게서 별다른 문화의 격차 같은 걸 느껴보진 못했다. 워낙 소탈한 성격 덕분이었을까.


내가 처음 남편에 대해 나와 다른 동네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던 건, 남편이 어릴 적에 아버님과 함께 테니스를 배우러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였다.


아무리 기억의 테이프를 돌리고 또 돌려 보아도 나는 자라는 동안 테니스장을 가보기는커녕 지나다니며 눈으로 본 일조차 없었다. 테니스 채를 잡아본 일도 단연코 없었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다른 직장 동료들이 남편을 향해서 “오 부잣집 아들이었구먼” 이런 뉘앙스의 말을 던졌을 때 남편이 귀까지 벌게져서 그게 아니라고, 우리 동네 사람들은 많이들 배웠다고, 되게 흔한 스포츠라고 부인했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의아했다.


먼저는 우리 또래 사람들 중에도, 영수학원 같은 거 말고, 테니스 같은 걸 배우러 그것도 아버지 어머니까지 온 가족이 함께 다니기도 하는구나 하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잘 산다는 말을 저렇게나 손을 내저으며 부인하는 남편의 모습이 내겐 또 다른 충격이었다.


왜? 가난한 우리 동네가 아닌 부유한 다른 동네에 산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나는 그 의아함을 마음 한 구석에 넣어두었다.



결혼 후, 테니스 말고도 남편이 배운 게 참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과목뿐 아니라 수영, 속독, 피아노, 공부법을 가르쳐주는 무슨 캠프 등 다양한 사교육의 세계를 어릴 적부터 원하기도 전에 알아서 제공받았던 남편.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괜히 남편이 부러워졌다. 그렇게나 많은 기회를 누렸구나, 나는 가져보지 못한 무수한 기회들. 웬 복이람...  


남편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에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나는 아이들에게만큼은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일렁이곤 했다. 정작 그럴 만한 여력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닿으면 갑자기 내 처지가 생각되면서 서글퍼졌다.  


그렇게 해결하지 못한 부러움은 질투로 그리고 다시그때 그 시절, 절대로 저쪽 동네 아이들처럼 될 수 없을 것 같은 17살의 나로 돌아가 그때의 초라함을 다시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가져본 남편은 정작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만큼은 본인이 원하기 전에는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넘치도록 시켜줄 여력도 없지만, 여력이 돼도 그게 무엇이건 억지로 앞서서 시키는 건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이 답답했다.    


알아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보게끔 도와야 하는 게 부모로서의 역할이 아닌가, 그게 없어서 내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아왔는데, 그렇다고 내가 대단히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잡겠다는 것도 맹세코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조금이라도 앞서 주려고 하면 남편은 고개부터 절레절레하곤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어려움에 봉착했다.


학교에서 수영 수업을 하는데, 수영장을 가본 적이 많지 않고, 배워본 적도 없는 아들을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수영을 잘해서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 수영 수업이 있었는데,

아들은 일요일 저녁만 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너끈히 해내는 걸 자신만 못하니 부끄러운데다, 익숙하지 않은 수영장이 너무나 두려워서 스트레스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중이었다.


이런 경우 답은 분명했다.


우리가 아들을 데리고 수영장을 다니면서 편안하게 배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러나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도 같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들이 이렇게 수영을 못하는 게,


이런 수업이 곧 있을 터이니 미리 경험해 보라는 조언과 함께 미리부터 턱턱 수업을 끊어주지 못한, 그 정도로 부유하지 못하거나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부모,


즉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었던 그 결핍감을 아이들에게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자 한도 끝도 없이 슬퍼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가 선뜻 아들을 수영장에 데려가 수영을 가르쳐줄 수도 없었다.  


학창 시절 수영장에 가 본 일이라곤 손에 꼽혔다. 동네에 수영장이 처음으로 생긴 게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수영 좀 배우겠다고 한두 달 다니다 포기한 기억만이 선연하게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남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향해(말로 쏟아낸 적은 없지만), 당신이 좀 해결해 보라고, 당신은 어릴 때 수영도 배워보지 않았냐고, 많이 받아본 당신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야지 하는 원망이 일렁일렁거렸다.


그러나 남편은 언제나처럼,

그다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천천히 하다 보면 될 거라고 정말로 믿는 것 같기도 했고, 몰아붙여서 스트레스를 주느니 못하는 게 더 낫다고 믿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남편의 그런 태도에 대해 어쩌면 많이 가져본 자의 여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뒤에서 쫓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겪어보지 못해서모르기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그 강한 확신은, 나의 덜 강한 확신을 늘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나는 늘 남편의 강한 확신에 밀려서,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남편의 이 강한 확신은 어디로부터 일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남편의 그 강력한 확신이 '가져본 자의 여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시절 겪었던 두려움’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족이 함께 수영장에 갔던 날,

아이들과 조금 놀아주던 남편이 슬며시 나가서 밖에한참을 앉아있었다.


정작 수영장이 낯설고 수영도 잘 못하는 나는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물속에서 논다는 게 이렇게나 재미있는 일이었나 싶어, 애들과 놀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신나게 놀고 있었던 반면에 말이다.


또 저런다 싶어서,

남편을 끌고 들어올 작정으로 나갔는데, 남편은 얼굴이 하얘져서 한쪽에 앉아있었다.


수영장이 너무 힘들다고,

수영장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남편은 말했다.


어릴 적, 다녀야 해서 다녔지만, 힘들었던 기억들이 많아서인지, 수영장에 오는 게 너무나 힘들고 싫다고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다, 하얗게 뜬 얼굴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얼른 끝내주기를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어쩐지 그가 불쌍해졌다.


다 가져봤다는 이유로 몰아붙일 생각먼 했지, 그 속에 이런 불행들까지도 함께 들어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제야 그가 그토록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은기회가 아니라 부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많이도 배웠다는데,

나는 남편이 그걸 즐겁게 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고작 가지고 있는 취미생활이라는 것은 집에서 뒹굴대며 책 보는 거.


어린 그에게 그 모든 게 의무였고,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었던 걸까?



더 많은 기회를 누렸고,

더 많이 받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살아가는데 유용하기는커녕 살아가며 누릴 수 있는 크고 작은 즐거움까지 앗아갈 정도의 굉장한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불행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남편이 이해가 되었다.


왜 그토록이나, 조금이라도 더 주려는 나를 막아서려 했는지.



힘에 지나도록 주려 들면,

그래서 거기에 원망과 힘이 실릴 듯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주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이라며,

풍족함이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눈빛으로 말했던

그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는 그제서야 헤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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