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삶, 잃어버린 삶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났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당시 영어도 못하고 불어도 못해서 쩔쩔매던 나와는 달리 5개 국어가 유창한 친구였다.
미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남미에서 대학을 독일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럽 출장이 많은 일이라 프랑스에 체류하며 프랑스어도 배우고 일도 하던 친구였다.
나이 차이가 꽤 있었지만, 워낙 살갑고 친절한 그 친구의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첫 만남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내가 프랑스에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보인 첫 반응이
“언니, 혹시 한국에 돌아가실 거라면 애들도 꼭 데리고 돌아가셔야 해요. 절대로 여기 떼 놓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였다.
물론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생전처음 만난 사람이 오늘 통성명을 했는데 다짜고짜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 의아하게 느껴졌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서
그녀가 살아온 삶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두 살 위 언니와 그리고 자신, 바로 아래 동생이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년 시절을 부모님이 없이 하숙집에서 보내야 했던 그녀는 그 덕분에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지만, 늘 마음이 추웠다고 했다.
엄마아빠가 필요한 순간들은 너무나 많았고,
무섭고 두려웠던 순간들도 너무나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너무 멀리 있었고, 엄마와 아빠가 그녀를 위해 제공해 준 모든 것들은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무서웠다.
그러나 겨우 그 모든 걸 견뎌내고 영어가 조금 수월해지고 미국이 조금 편안해질 무렵,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스페인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작지 않은 사업체를 꾸리고 계셨고, 세계 곳곳에 시장 진출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계셨다. 그렇기에,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직원이, 그것도 믿을만한 직원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자녀들을 그렇게 길러내는 게 낫겠다는판단을 하신 걸까? 그 모든 과정을 잘 따라오고 잘 자라만 준다면야 마침내는 이 사업체를 물려줄 수도있을 것이라 여기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언니는 그저 뛰어난 성적과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여러 개 언어를 구사하는 후계자로 자라는 일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생은 막내인지라, 그저 보호받을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운데에 있던 그녀는,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될 수 없었던 그녀는,
부모님의 조언을 따라
다시 한번 남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 믿었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녀의 엄마는 네가 나온 남미의 대학은 학문적으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조언과 함께 많은 학자들을 길러낸 독일에서 대학원을 해 보는 것을 권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엄마가 그녀의 인생 한가운데 놓은 허들을 하나씩 넘어야 했고, 그 허들을 넘는 대가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리스트에 새로운 언어를 하나씩 더 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나의 언어를 획득할 때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그녀는 그곳에 시장 진출이 가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낼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편에서, 어떤 때는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이 좀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우와'하는 눈으로 바라봐 줄 때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그 표정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어쨌거나 몇 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세계 곳곳에서 공부를 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기억 속에는 보내지고, 살아남은 기억 외에 보통의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 속의 아름다운 기억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어느 밤, 견뎌야 했고, 이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던, 그 외로웠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그녀를 덮쳐올 때면 그녀는 마치 홀로 버려진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에게 전화로라도 매달려야만 했다.
그렇게나 외로웠다.
그런 힘듦을 부모님께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 털어놓으면, 부모님은 “그래도 내 덕에 너 5개 국어를 다 잘하게 되지 않았냐, 너 하나 잘 되라고 이만큼이나 뒷바라지를 해 줬는데도 원망이냐”라고 도리어 역정을 내신다고도 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 모든 기회 덕분에 너무 일찍 홀로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남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기회를 받은 덕분에 남들보다 더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커졌고, 잘 해내지못했을 때 받을 질책도 더 커진 셈이었다.
그러고도 성공하지 못했을 때, 실패는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 돌아가야 했다. 때로 나에게도 더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나도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잠시나마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 실패의 순간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런 핑계가 없는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유로 남편도 자신이 우리보다 더 나은 환경에 놓여있다는 시선에 대해서 그렇게 발끈하며 방어적으로 반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부담을 안고도 잘 견뎌낸(겉으로는) 그녀는 성공한 직장인이 되었고,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었고, 5개 국어 능통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엘리트로 자란 그녀는 내게 정작, 부탁을 해 왔다. 자신의 자녀도 아닌 내 자녀들을 위해서 말이다.
“언니 제발 부탁이니까, 아이들 프랑스에 두고 가지 마요.”
그녀는 나중에야 내게 말을 해 왔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연애를 하고 다투고 헤어지고 하는 그 당연한 인생의 과정들을 마주할 때마다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고.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녀는, 많은 것을 이미 가졌고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그녀는, 그것을 얻기 위해 너무나 중요한 무언가를 희생시켜 버린 듯해 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을 그 아픔을, 다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단하고 외로운 인생을 견뎌왔을 그녀가
짠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한쪽 눈을 그제야 뜨게 되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외면하고 싶었던,
인생의 명암을 마주하고 선 기분이었다.
내가 뭉뚱그려 말했던 저쪽 동네 아이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듯한 그 인생의 이면에,
숨겨진 짙은 그늘을 이렇게 마주하고 서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평생을 부러워했던 것이
겨우 이런 삶이었던가...
내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다른 의미에서 그들도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내 눈에 너무나 부러웠던
그 '축복' 속에도 '저주'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