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가진 결핍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은중의 결핍은 비교적 명확했다.
그는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 그리고 아빠 역할까지 해야 하느라 늘 바쁘지만 무던히 애쓰는 엄마 아래에서였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 속, 엄마가 보여주는 사랑은 양적으로 부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중은 이해했다.
엄마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은중은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사랑만큼은 부족하지 않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왜 결핍이 오히려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는가?
그 답은 명료하다.
아빠의 부재,
그의 결핍은 눈에 보였고,
그의 아픔은 이해하기도 이해받기도 쉬운 것이었다.
그의 불행과 그의 결핍은 적어도 ‘내가 문제다’라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이토록 힘든 것은 눈에 보이는 이 결핍 때문.
엄마가 이토록 바쁜 것도 눈에 보이는 이 결핍 때문.
그는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힘든 순간,
그가 던질 수 있었을 질문은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닥치지 않은 불행 속에서 어떻게 이것을 해석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던 순간에
그는 분명 엄마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엄마는,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과 맞서 싸우며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다.
비관하며 무너지지도 않았고,
크게 원망하지도 않으며…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분투하며 살아가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 그리고 그 비극으로 말미암는 결핍을 삶의 우연한 부산물처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평범한 일처럼 해석해 나가는 법을 천천히 배워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은중은 결핍을 딛고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연의 집은 달랐다.
겉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집이었다.
명성과 부, 높은 학업 성취, 번창하는 아빠의 사업, 교사인 엄마.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결핍과 균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그들은 모두 불행했다.
상연의 아빠는 자신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기준대로 모든 것을 정렬했다.
결국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서, 가족 모두는 소외되고 고립됐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나
기형적인 가정의 모습이 탄생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완전하게 망가져 버린,
누구도 건강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없는 가정.
상연은 어땠을까?
아무리 돌아보아도 부족할 것이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연에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랑 앞에, 상연은 어떻게 이 상황을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날 부러워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 사이를 헤매다
마침내
상연은 그 모든 문제를
자신의 존재로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오빠가 결국 삶을 포기하고,
엄마 역시도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모두가… 결국 기어이… 그렇게 느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제라고….
그러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상연이 가진 이 고립감과 외로움은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
좋은 집, 좋은 환경, 부유함…
그 모든 걸 가진 상연에게...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내적인 결핍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긍휼히 여겨질 만한 요소가 아니었다.
도리어 더 비난받지 않을까.
누군가에겐 다 가진 이의 투정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상연은 가슴 한가득 결핍을 안고도
스스로 명료한 답을 찾을 수 없었고,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었다.
해석이 불가한 고통,
안개 같은 그 고통 속을 헤매며
그저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나’를
문제라 여기며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며
계속해서 내적 갈등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연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