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었던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작가라는 두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라는 단서와 함께.
글을 쓸 때면 마음속에 어지럽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다 쓰고 나면 무언가 명료해졌다.
옷장 속 어지러이 걸려있는 옷가지를 꺼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입을 수 있는 옷은 말끔히 개서 상자 속에 정리하듯, 뒤죽박죽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어 나름의 기준과 질서로 말끔히 정리해서 보기 좋게 꽂아 놓듯,
나는 그렇게 나의 일상을,
내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들을
글로 써 내려가면서 정리하곤 했다.
글을 쓰기 전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글이 나를 인도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어쩐지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나 역시도 내 글을 통해서 재발견하게 된달까.
그리고 쓰인 글을 보면 어쩐지 뿌듯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글들은 그저 막 흘러가고 있는 내 인생의 작은 증거들 같았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그렇게라도 훑어볼 수 있다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잘하고 있다 괜히 내 어깨를 내가 토닥이고 싶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브런치를 시작한 뒤,
내가 쓴 글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몹시 즐거웠는데...
그 즐거움은 나를 계속해서 쓰게 했고
계속해서 쓰고 싶게 했다.
그러나 브런치를 시작한 뒤 1년쯤 뒤,
나는 돌연 글쓰기를 멈추었다.
더는 쓰고 싶지가 않았다. 쓰고 나서 보는 나의 결과물이 흡족하지가 않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멋진 생각들이 글로 쓰이고 나면 어쩐지 비루해졌다. 그 느낌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나누는 게 즐거웠던 겸손한 마음은 어느새 비교로 넘어갔다.
세상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았고, 나처럼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심지어 나보다 더 열심히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구독자 수, 혹은 하트 개수가 나의 한계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그새 책을 냈다는 글이 올라오면 어쩐지 툭... 하고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이 세계가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비교에 흔들리는 나 자신이 미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기장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쓰면
이런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으니까.
근래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전에 가졌던 그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끔히 정리가 되진 않았다.
그냥 쓰고 싶은 게 많았다. 가슴에 가득한 무엇, 그 찰랑이는 생각들을 써내고 싶었다. 이대로 다 사라지는 게 아까웠다. 다시 충동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가졌던 진짜 문제의식을 마주했다.
시간이 아까웠다. 글을 쓰는 건, 제대로 쓰는 건, 시간이 걸렸다. 하루에 적어도 30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이며 글을 써 내려가는데 작가가 되지도 못하고, 책으로 내지도 못할 글이라면... 이 시간이 낭비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할 일은 많았다. 공부를 쫓아가려면 복습도 해야 했고, 영어와 불어 공부도 해야 했다. 어쨌거나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 결과물이 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 같았다.
그러나 오래 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이 사소한 글쓰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것은 나에게 아가미와 같은 것이었다.
글을 써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꼈다.
이 팍팍한, 해야 할 일들의 나열인 일상 속에서
강제가 아닌 기쁨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사소한 활동을 하나쯤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효율과 효용을 따져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책을 내야지만 작가라고 부르는 건 세상의 기준.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오늘 내가 글을 쓰고 있다면, 적어도 내 세계 속에서 나는 작가인 셈이었다. 세상에 내어놓을 명함이 없을 뿐.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문제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쓰는 이 글이 과연 가치 있는 글일까?
누군가에게 나눌 만한 글일까?
이 대목에 닿자 다시 스르르 자신이 없어졌다. 어쩐지 다시 일기장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 무수한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며 이렇게 써 내려갈 수 있는 걸까.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막막해진 나는 다시 멈추고 싶었다.
아휴... 모르겠다...
딱 그 지점에 멈추어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머물러 섰다.
나아감과 머무름 사이에서
이 질문이 내게
상당히 중요한 질문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어제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 때마침 시간이 났다.
그래서 미술관에 다녀왔다. 거의 1년 만이었다.
보통 1년에 한두 번, 미술관에 간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대충 덮어두고 살던 어떤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게 좋았다. 내가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런 고민을 안고 있었구나... 그림은 마치 내 안에 있는 숨겨진 문제들을 비추어내는 거울 같았다.
그리고 기꺼이 답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 느낌이 좋아서,
시간이 나면, 기꺼이 미술관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제도 그랬다. 그러나 딱히 이 문제를 붙들고 갔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한 그림 앞에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이 화가는 도대체 왜 이 그림을 그렸던 걸까?
말위에 타고 있는 어떤 젊은 여성이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를 이 여성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이 여인의 아름다웠던 혹은 평범했던 한 순간 앞에 서 있었다.
작가는 왜? 라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대답이 툭 튀어 나왔다. 기억하고 싶어서....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화가들이 그린 모든 그림이 다 가치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억하고 싶거나 남기고 싶은 어떤 순간들을, 어떤 사람들을 기꺼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우리 앞에 남겨져,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 옆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 화가가 오늘날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파리의 한 지하철 역을 걸어 나오는 할머니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보였다.
나의 오늘이 보였다.
왜? 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그림 앞에 서서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셈이었다.
모두를 위한 그림이 없듯이, 모두를 위한 글도 없다.
사회적 가치를 가진 그림이 꼭 내게 가치 있는 그림이 아닌 것처럼, 나의 글도 그럴 것이다.
그제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생각이 스르르 풀어진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줄곧.
그리고 작가가 되려면
가치가 있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호할 만한 글.
그러나 그것을 향할수록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쓴 글들에 달리는 하트 개수에 따라
나의 행복지수가 달라졌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라져 버릴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서.
이미 사라져 버린 아련한 것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지치고 힘들 때
나 역시도 누군가의 삶을 기웃대며
그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그걸 위로 삼아 살아가듯
내 글이 누군가에게
딱 그 정도의 위로만 안겨줄 수 있어도
나는 충분하다.
그랬다.
글이 문제가 아니었다.
글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나의 야망이
사람들의 인정과 승인을 갈구했던 나의 욕심이
나의 행복을 가로막았다.
그것을 기꺼이 거두어낸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다만 한 두줄 이 깨달음을 남기며
기어이 나는 나의 삶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