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
사람들은 누구나 고독하고 혼자 삽니다. 그래서 실은 직업이라는 형태로 나의 부족한 점들을 서로 메꿔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략) 내가 하는 어떤 일로 누군가의 이마를 덮어줄 수 있다면, 그 일이 그 순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도 서로의 이마에 손을 내밀고 그 손에 이마를 맡길 수 있는 존재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우리 모든 업의 본질 아닐까요.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
며칠 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의사가 말했다. 한번 부딪혀보고 비난도 받아보고, 실패도 해보자고. 그리고 그것들을 겪고, 지나오는 과정을 함께 할 동료로서의 자신이 있으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고. 곧 휴직계를 내려고 떼어온 서류를 비장의 카드처럼 교무실 책상에 두고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 보자, 내가 함께 해주겠다는 말이 생각 외로 힘이 되었나 보다.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새순 돋듯 피어올랐다. 교실에서의 시간 동안 ‘더는 못 버티겠다. 이젠 정말 못하겠다.’라는 생각만이 지배적이었던 나에게 큰 변화이긴 하다. 그런데 마음의 병 때문인지, 그로 인해 먹은 약 때문인지 팔다리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시들시들한 느낌은 계속되어 여전히 고민이 된다. 내가 버티면 정말 할 수 있을까? 한 단계 성장할까? 아니면 잠시 쉬라는 신호인 것일까? 그 고민과 결정은 여전히, 온전히 나의 몫이지만 그녀의 직업으로 나의 이마를 잠시 짚어주어 용기를 심어준 데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분주하게 먹을 것을 실어 나르는 개미 떼, 부산하게 꽃들을 찾아다니는 벌들, 먹고살기 위해 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모두 “죽음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이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내장된 생명의 신호가 모든 생물로 하여금 먹을 것이 찾아 움직이게 한다. 이 행동을 중단할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는 행위’에는 본능과 치열함과 슬픔의 냄새가 난다. 정신이 숭고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조차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육체의 허기는 우리를 저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다시 끌어내린다.
-오민석, ‘잘 살 권리와 사회적 사랑’, <중앙일보> 2019년 6월 11일 자
약을 먹으니 하루종일 졸리고 아침에도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지만 심장이 두근대는 긴장감이 없어지니 입맛이 되살아났다. 그러니 잠시 빠졌던 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올랐다. 힘든 와중에도 먹고, 먹고살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일하러 나가고, 이렇게 먹고산다는 것,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것, 그 현실이 마음 아프다. 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버티다 보니 성숙해지는 그 과정도 참 서글프다. 조금 센티해진 나에게 저자는 작가로서의 직업으로 나의 이마를 덮어준다. 그렇게 사는 우리에게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마저 가득하기를 기원해 주며. 나 또한 내 업의 본질에 충실해보며 다른 사람의 이마를 덮어줄 수 있길, 나의 이마를 덮어준 모든 분들께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마저 가득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