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친구가 갑자기 다가와서 여러분을 뒤에서 툭 치면서 ‘물 좀 많이 마셔. 영희가 물 많이 마시래.’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이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이 친구가 왜 이러는지 당황스럽고 의아할 것이다. 곧이곧대로 물을 마셔줄 이유가 없으니 되묻기부터 한다고 하자.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영희는 뭐야? 걔가 누군데?”
“내가 물을 마시든 말든 네가 왜 그걸 신경쓰는데?”
혹은, 당신이 만약 속이 단단히 꼬인 사람이라면 그 친구를 할 말 없게 만들고 싶었던 나머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
“물? 그게 뭔데 씹덕아.”
그러면 친구가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하자.
“너 내가 요즘 옆에서 보니까 물을 거의 안 마시는 거 같아서. 영희는 서울대병원 교수인데, 걔가 물만 마셔도 주요 질환 발병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넌 친구도 없는데 내가 챙겨줘야지, 나 아니면 누가 너를 챙기냐. 아참, 물은 H2O라는 화합물인데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화학작용에 관여하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이야.”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면, 아무리 평소 안 좋아하던 친구가 하는 말이어도 설득을 당해서 물병에 손을 가져가게 되지 않겠는가?
상당히 기괴한(?) 예시로 글을 여는 이유는, 이제부터 하게 될 말이 전부 저 대화 속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앞서 ‘0. 들어가는 말’에서도 언급했지만 글을 못 쓰는 사람도 리포트는 잘 쓸 수 있다. 주제와 내용만 잘 잡는다면! (기억이 안 나시거나, 이전 글을 안 보셨다면 뒤로가기를 눌러 꼭 보고 오시라. 여러분이 다른 것도 아닌 주제와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두었다.)
그리고 내용에 들어가야 할 내용은 저 대화 속에 들어 있는 게 전부다. 주제는 리포트가 어떤 내용 요소를 포함해야 할지 이해하게 되면 자동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오늘은 리포트가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하는 글인지, 리포트의 본질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한 가지만 기억하자. 리포트는 끊임없는 설득이다! 이건 여러분이 이 시리즈의 다른 세부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리포트를 잘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꼭 머릿속에 새겨야 할 문장이다.
교수가 좋게 평가하는 리포트는 끊임없이 설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리포트이다. 이 부분을 여러분이 완전히 납득해야 하므로 추가로 설명을 하고 싶다. 흔히들 수학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들 한다. 어떤 식으로 풀기를 원하는 것 같은지 예측(궁예질)을 잘해서 그대로 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리포트 과제도 똑같다. 교수가 이 과제를 왜 냈을까? 교수는 무엇을 원할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흔히들 교수라는 권위가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교수가 뭔가 대단한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를 쉽게 만들기 위해 교수를 포켓몬처럼 생각해 보자. 교수는 포켓몬이다! 부담스러운 문제를 해결할 때는 권위를 해체하고 바라보는 게 도움이 된다.
야생의 교수몬이 나타났다!
교수몬이 더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A. 학생이 정성스럽게 쓴 인스타 감성 에세이
B. 동료 교수가 아무렇게나 쓴 논문 초고
설마 A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정답은 B다. 교수몬은 그냥 자기가 늘 보던 그런 글을 원한다. 일단 익숙하니까. 교수몬은 자기가 늘 봐오던 학술적인 글을 보면 일단 점수를 잘 주고 보는 습성이 있다. 자, 그러면 교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잘 쓰기보다도 학술적인 글을 충실히 흉내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리포트 과제의 속성을 알면 쉽게 나오는 결론이다. 리포트는 대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이자 연구기관에서 여러분이 학술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학술적인 글쓰기를 연습시키는 차원에서 내주는 과제이니까, 리포트를 쓴다는 것은 학술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 ‘그래서 그 학술이라는 게 뭔데?’라는 질문이 따라 나온다. 이것 역시 어렵지 않다. 학문은 내가 뭔가 한 주제에 관해 깊게 생각을 하는 것이고, 학술적인 글은 그 생각한 결과를 생판 남인 사람들한테 이해시키기 위한 글이다.
여기서 생판 남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나한테 우호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까 들었던 예시를 떠올려 보자. 자기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는 친구(나)에게 물 마시라는 말 한마디를 했다가 친구가 어떤 질문 폭격을 받았는지 기억하는가? 심지어는 물이 뭐냐는 배배 꼬인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리포트 과제를 받은 여러분은 그런 식의 반응을 할 게 분명한 생판 남인 학술 공동체의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것과 같다. 아까 예시에서 ‘친구’ 입장이 되어 보자. 그 온갖 적대적인 질문에도 친구는 하나하나 성실하게 답을 해 주었다.
1.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네가 물을 안 마시는 것을 봐서 네 건강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2. “영희는 뭐야? 걔가 누군데?”
-> 내가 언급한 영희는 서울대병원 교수다. 서울대병원 교수가 하는 말이니 믿을 만하다.
3. “내가 물을 마시든 말든 네가 왜 그걸 신경쓰는데?”
-> 나는 네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에 이걸 신경 쓸 의무가 있다.
4. “물? 그게 뭔데 씹덕아.”
-> 물은 H2O라는 화합물인데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화학작용에 관여하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이다. (네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언급은 했으니 설명은 해 주겠다는 식)
정말이지 정성이 가득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상황을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을 학술 공동체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에 적용하면 된다.
1)은 당신의 생각을 학술 공동체 사람들이 왜 알아야 하는지, 다른 할 것도 많은데 가만히 앉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2)는 당신이 인용한 근거를 왜 신뢰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 3)은 당신이 연구했다는 게 뭐가 특별한지, 수많은 연구 중에 당신의 연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4)는 여러분이 언급한 개념이 대체 그래서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4번은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시비를 거는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여러분은 지금 학술 공동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켜야 하는, 철저하게 을인 입장에 놓여 있다. 까라면 까야 한다.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여러분은 자신이 이 주제를 왜 이야기하고 있으며, 왜 이런 근거를 사용했는지, 왜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지, 그리고 당연하게 언급했던 개념들이 사실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끊임없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이제 갓 리포트를 쓰기 시작한 여러분이 그동안 몰랐던 거지, 사실 대부분의 학술 공동체에서는 지금까지 계속 이런 일이 벌어져 왔다. 학술 공동체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렇게 해명하고 변명하는 게 일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잘 모르는데,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교수가 매일같이 보는 글은 이렇게 해명과 변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여러분이 대충 쓴 글은 교수 입장에서는 눈곱만큼도 학술적인 글로 안 보이는 건 당연하다.
리포트는 주제 대충 정해서 관련된 자료 좀 제시하고 적당히 티 안 나게 복사 붙여넣기한 말들로 꾸며서 결론으로 포장해 제출하는 게 아니다. 그건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나무위키 문서에 가깝다. 그리고 교수몬은 그동안 자기부터가 정제된 학술적인 글을 너무 많이 봐 왔다 보니, 학생들이 대충 검색 좀 해서 조사 요약본 비스무리 한 걸 만들어 내면 학술적인 글로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레포트를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다면, 아니면 써 봤더라도 제대로 점수를 받지 못했다면 레포트에 관해 여러분이 품고 있던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다시, 리포트는 끊임없는 설득의 기록이다.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는 학술 공동체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수많은 예상 질문이 무엇무엇이 있으며,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소개하겠다.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리포트를 쓰는 이유를 밝혀라
2) 내 리포트가 중요한 이유를 밝혀라
3) 방법을 선택한 이유를 밝혀라
4) 근거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라
5) 단어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라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끊임없는 설득을 위해서는 정말 사소한 것까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러분이 ‘리포트에서는 이런 것들을 밝혀야 하는구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리포트의 퀄리티가 정말 크게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동안 주제가 뭔가 대단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자료가 좋은 자료여야 한다고만 생각해서 검색에 열을 올리고 자료를 우겨넣는 데에 열중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리포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기만 해도 지금까지 했던 노력보다 적은 양으로 더 좋은 리포트를 쓸 수 있다.
오늘은 리포트가 무엇인지, 리포트의 본질을 짚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리포트는 끊임없는 설득의 기록이다.” 세 번 복창합시다.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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