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사려니오름숲, 제주
가을 휴가를 왔다. 여름휴가가 없는 우리에게 꿀 같은 휴식이었다.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고 먹고 싶었던 거 다 먹어보자! 여유롭게 쉬어보자"가 이번 여행 모토였다. 이 여행의 계획은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추석 연휴 길데!"라는 한 마디에 우리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멋진 숙소를 찾아냈다. 휴대폰에 카운트다운 앱을 깔고 하루하루 날짜가 줄어드는 걸 확인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듯했던 그날은 차근차근 다가왔다. 6개월 전에 예약한 숙소비용은 이미 다 출금이 되었고, 중요한 일정들은 예약을 마쳤다.
기대했던 이벤트 중 하나는 바로 사려니숲길 도슨트 예약이었다. 평소에 동네 뒷산 정도의 등산만 하기 때문에 복장이며 장비가 걱정되었다. 가벼운 트래킹화와 간편한 가방을 챙겼다. 그래도 우리가 제주에 와서 여러 곶자왈들을 걸어 다녔는데 그때마다 청바지면 충분했으니 장비 욕심은 내려두기로 했다.
비바람을 뚫고 한 시간 반정도 지연되어 제주에 도착했다. 이 날씨면 트래킹은 무산되겠는데 싶었지만, 하루만 거세게 비가 오고 다음날로 방긋 밝고 맑고 더워졌다. 예약 시간은 두 시. 날은 점점 더워져 28도. 가을이 맞나 싶게 푹푹 쪘다.
생소한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 사려니숲길이 아니었다. 위치부터 달랐고 예약자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정식 명칭은 "한남사려니오름숲". 주차장에 사람들이 쏙쏙 모여들고 1차로 고바위를 올라갔다. 작은 통나무 집 앞에 누가 봐도 숲에서 일하시는 분이 앉아계셨고 이름을 확인 후 패찰을 하나씩 주셨다. '몇 시간이나 걸을 수 있냐'를 물어보신 후, 지도를 보여주시며 '삼나무 전시림'까지 다녀오라고 했다. 왕복 두 시간에서 세 시간 거리. 이곳을 대표하는 볼거리. "방금 올라온 고바위가 여기서 가장 힘들어요. 완만하고 평평하니 잘 다녀오세요"라며.
"해설사는요?"라는 내 물음에 그건 오전만 가능하다신다. 오후 시간은 제약이 많다고. 특히 두 시 시작하는 트래킹은 4시 반까지 모두 다 들어와야 5시에 문 닫고 보고하고 퇴근하신다고 했다. 그렇군. 우리의 도슨트는 없군. 그럼 어쩔 수 없지. 떠나볼까?
길은 완만했다. 날은 점점 뜨거워졌다. 간혹 산들바람이 불어주면 고마웠다. 청바지가 몸에 붙기 시작했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앞머리는 이마에 딱 들러붙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렇게 한 시간을 꼬박 걸어 올라가다 보니 전체적인 공기가 점점 서늘해졌다. 고도가 높아졌고 나무도 많아서겠지. 그리고 만난 <삼나무 전시림>.
1933년에 일본서 가져온 삼나무 종자로 조성하기 시작해 지금은 현존하는 제주 삼나무 숲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했다. 나무 한 그루의 두께가 고서방 몸통의 두 배만 했다. 나무껍질에 쌓인 이끼의 더께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숲 안쪽까지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꼬마 어린이도 숲을 즐길 수 있었다. 전시림의 목적이 교육, 보전, 체험이므로 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려오는 길은 역시 수월했다. 오르는 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도 거뜬히 가능해졌다. 그때, 고서방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뭇잎으로 그림을 그리는 여자분이 계시데. 남편과 사별하고 마음이 힘들어 등산을 하셨다는데,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서 그림을 만드신 거지. 유명해져서 전시회도 하셨다는데."
"사진으로 찍어서?"
"처음엔 사진으로 찍었나 봐. 바닥에 그냥 뒀으니 사라지잖아. 그다음엔 보존하기도 했나 보던데. 요즘 근황은 모르겠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셨을 거야. 엄청 다정하고 멋진 남자분을 만난 거지. 알고 보니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내 남편은 다정한 축에도 못 들었구나."
"그래서 내가 왜 마음이 힘들어서 등산을 했나 싶고?"
"그렇지.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거지. 근데 등산을 열심히 했으니 건강해졌지, 나뭇잎 그림으로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었지. 새로운 사랑도 만났고. 그 분과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느라 더 이상 작품 활동도 못 하시는 거지."
"제법 작가 같다, 너."
실은 더 리얼하게 얘기했다. 왠지 정말 계신 분이라면 미안하니 글을 쓸 때 조심스러웠다. 나뭇잎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검색을 해 봤는데, 폼들과 친하지 않은 나는 찾지 못했다. 언젠가 보게 되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그저 내 여행에, 나의 삶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데, 제법 작가 같다는 말, 꽤 듣기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