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막대한 인력과 자본을 가진 대기업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이 내놓는 신제품은 TV부터 모든 포털 뉴스기사에 도배되다시피 합니다. 또 이들의 조직에는 내놓아라 하는 수재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이렇게 입사한 수천수만 명의 인력이 일사불란하게 사업목표에 맞춰 효율적으로 관리됩니다.
반면 스타트업은 어떨까요? 마케팅 비용이 부족한 초기 스타트업 팀은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콜드메일과 커뮤니티 댓글달기에 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표 한 명이 영업부터 마케팅, 기획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하거나, 팀원 한 명이 대기업에서 여러 부서가 하는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에게 대기업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모든 서비스와 제품이 기존 시장과 어느 정도는 겹치기 마련이고, 스타트업이 새로운 시장을 발굴했다고 해도 대기업에서 준비했다는 듯이 따라 들어오기 마련이거든요.
뭐 하나 유리할 것 없어 보이는 스타트업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가능할까요? 물론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만, 일단 우리에게 성공사례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10명 남짓한 팀이었던 초기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에 한 일, 피그마가 어도비에 한 일을 생각해 보세요.
대기업이 자신과 비교도 안 되는 작은 스타트업과의 경쟁에서 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언급한 몇몇 사례가 요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전 시기의 지배적인 기업이 몰락하고 작은 기업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시장경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됐던 일입니다.
'파괴적 혁신'이론으로 유명한 크리스텐슨 교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심층적인 연구를 남긴 바 있습니다. 유전학에서 세대주기가 굉장히 짧은 초파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크리스텐슨 교수는 시장의 주요 기업이 매우 빠른 주기로 물갈이되었던 80-90년대 디스크 드라이브 시장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요.
본 포스팅에서는 크리스텐슨 교수의 ‘혁신기업의 딜레마’에서 언급된 대기업이 신생시장에서 실패하는 요인을 간추려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비록 지금과 비교하면 시간이 꽤 흐른 연구지만, 오늘날 대기업과 경쟁하는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위해 어떤 부분을 노릴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첫 번째 이유는 대기업은 기존고객과 투자자 중심의 의사결정 압력이 강하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크리스텐슨 교수가 얘기하는 '파괴적 기술'은 시장 초기, 고객이 적고 낮은 이윤을 가져옵니다. 대기업은 기존고객을 대상으로 고가 및 고품질의 하이엔드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내는 비용구조로 최적화하는 게 유리합니다. 반면 이런 비용구조상, 비교적 적은 수익을 내는 신생시장에 자원을 투자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4억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은 20% 매출성장을 위해 8천만 원만 더 벌면 됩니다. 하지만 4000억 매출을 올리는 기업은 같은 비율의 성장을 위해 800억 원을 더 벌어야 합니다. 언급했듯이 대게의 신생시장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신생시장을 전략적인 성장동력으로 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기업에 많이 보이는 모습은 이 신생시장이 충분한 규모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고, 이 때문에 종종 신생시장을 주도할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합리적인 접근 방식은 시장의 규모와 성장률이 이미 잘 알려져 있고, 기술 발전의 경로와 고객의 요구가 예측되는 경우 유효합니다. 대부분의 기존 경영자들은 분석과 기획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사업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파괴적 혁신이 일어날 때, 기존 기업의 기획자들과 전문가들의 예상은 한결같이 빗나갔습니다. 아무 자료도 없는 시장에 기존에 사용하던 기획 및 마케팅 기술을 사용하려는 노력은 빈번히 헛된 노력으로 그칩니다.
조직은 단순히 그 안에 모인 사람의 집합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 자체는 적절한 훈련을 받으면 충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을 이루는 프로세스와 가치체계는 사람만큼 유연하지 않다는 것이 크리스텐슨 교수의 주장입니다. 앞서 언급한 1번, 2번과 비슷한 맥락에서 기존 조직이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제품개발에 맞춰진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낮은 이윤을 내는 제품개발에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파괴적 혁신은 기술 발달의 속도가 주류 소비자가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설 때 일어납니다. 주류시장의 요구와 부합하는 제품은 종종 이런 요구를 단순히 초과 달성하려는 경향을 띌 때가 있습니다. 우수한 제품을 개발함으로써 앞서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기업이 고성능 고이윤 시장을 위한 경쟁을 펼치다가 하이엔드 시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낮은 가격대의 시장에서 파괴적 기술을 채택한 신생기업이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신생기업의 제품이 소비자가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개선 됐을 때, 소비자는 기존과 다른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연구를 더 자세히 읽어보면, 사실 대기업도 신생시장이 얼마나 유망했는지,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파괴적 기술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꽤 많은 대기업이 나중에 자신들을 무너뜨릴 기술을 가장 먼저 연구하고 시장에 테스트했던 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텐슨 교수의 결론에 따른다면, 결국 대기업으로 하여금 신생시장에서 패배하게 만든 원인은 의사결정 가치체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훌륭하고 합리적인 경영자라면 자신의 조직이 가장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고, 불확실성이 적은 방향으로 비즈니스를 이끌어가는 게 당연할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합리성에 기존 시장에맞춰진 조직의 특수성과 잠재시장 대신 기존시장을 선택하게 만드는 역학관계가 숨어있는 것이지요.
그럼 스타트업은 "확실성 대신 잠재력(불확실성)에 투자하라!"가 이 글의 시사점일까요?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고객은 변할 수 있으니 변화에 예의주시 해야 한다"가 이 연구의 시사점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은 기존 시장에서 신생(불확실한) 시장으로의 고객의 변화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빠르게 실행하는 것이 관건이겠지요. 결국 미래의 불확실성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새로운 주인공을 결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