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Routine)의 필요성

by 즁이

영어 단어 ‘루틴(Routine)’의 사전적 의미는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입니다. ‘판에 박힌, 지루한’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루틴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말이죠.


스포츠에서 루틴은 ‘특정 생각과 행동을 일상화, 자동화함으로써 경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안요소를 없애고 집중력을 높이는 운동선수들의 습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빙상의 여신 김연아 선수의 경우 경기 시작 전 ‘반시계 방향으로 빙판 활주 한 번 하고 뒤로 돌아 S자 그리며 요리조리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준비를 했고, 신궁 기보배 선수는 ‘① 오른쪽 깊이 ② 10점 방향 ③ 강하게(양팔) ④ 해봤으니 편안하게’라고 쓰인 루틴 카드를 시위를 당기기 전 뚫어지게 쳐다봤고, 백발백중 진종오 선수는 ‘탄 장전 후 손을 주머니에 넣고 구시렁 구시렁 독백’을 했다고 합니다.


루틴하면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소속 박한이 선수를 빼놓을 수 없겠죠. ‘장갑 벨크로 떼었다 붙이기-점프하며 발 두 번 털기-고개를 숙이고 킁킁거리며 헬멧 냄새 맡기-헬멧으로 머리 2번 쓸어올린 뒤 헬멧 쓰기-배트로 홈플레이트 뒤쪽 두 차례 톡톡 치기-배트로 홈플레이트 앞쪽에 선 긋기’등 복잡하고 긴 루틴으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그 기량을 인정받은 선수들이고, 그에 걸맞는 결과도 얻어낸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에 박히고 지루한 준비 절차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스포츠에서의 루틴에 대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불안요소를 없애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 일겁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고 수많은 연습을 해왔다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또는 그보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과 경연의 자리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감. 나아가 독보적 위치에 있는 선수라 하더라도 나보다 못한 선수에게 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궁극적으로는 내 스스로를 컨트롤 하지 못해 실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그리고 이런 불안감들로 인해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어려움. 바로 이런 것들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이 루틴일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나 수만 번의 연습 과정에서 익숙해진 일련의 행위, 절차 등을 반복함으로써 일상과 연습에서 느꼈던 편안함과 자신감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변호사는 어떨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변호사 역시 이런 루틴이 필요하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 섰던 일. 상담을 하고 의뢰인과 고민을 했던 일. 손을 모으고 불안에 떨고 있는 피고인의 가족들을 두고 최후변론을 했던 일. 증인신문 과정에서 어떻게든 논리의 허점을 찾으려 파고들었던 일. 검사의 냉기어린 눈빛을 피고인과 함께 상대하며 무죄를 호소하였던 일.


처음으로 맡게 되었던 변호사의 업무는 결코 녹록치 않았고 불안과 긴장,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와는 또 다른 실무 앞에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연차가 쌓이고 경험이 더해지며 처음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건을 대하고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 일은 참 어려운 일이구나’라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변호사 업무의 특성상 비슷한 사건은 있을지언정 결코 동일한 사안은 있을 수 없는데다가, 의뢰인의 긴장과 스트레스까지 함께 짊어져야 하다 보니 불안과 긴장을 온전히 털어낸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업에서 접하던 사건은 그것이 실제 사례를 기반으로 한다 하더라도 글로만 마주하고 끝낼 수 있었지만, 의뢰인, 상대방, 수사관, 검사, 판사 등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수 만가지의 경우의 수 앞에 놓이게 되니 이를 응대하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이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연락들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건들을 대하다 보면 정해진 범위, 정해진 시간 그리고 정해진 장소에서 차분히 문제를 풀 때와는 다르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특히 주간에는 각종 재판, 상담, 출장 등으로 외부 활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차분히 앉아서 서면을 작성한다든가 기록을 살펴본다든가 전략을 고민한다든가 등의 시간을 내기가 참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업무의 ‘루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틴’에는 딱히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계적인 선수들도 다 제각각의 ‘루틴’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건이 종료되면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상담을 끝낼 때마다 의뢰인에 따른 대응방법 등을 정리할 수도 있을 테고, 법정에 나가는 일이 떨린다면 법정에 들어서기 전 각자의 주문을 욀 수도 있을 겁니다.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수들이 굳이 ‘루틴’을 유지했던 것은 불안을 없애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 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께서 맞이하실 수많은 시험과 가장 부담스러운 변호사 시험.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 맞이하게 될 수많은 상황 속에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루틴’을 하나쯤 가져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제 ‘루틴’이 궁금하시다구요?

.저는 출근하면 일을 시작하기 전 연필부터 깎습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연필도 잡념도 함께 깎여 나가더라구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양심적 병역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