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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Oct 26. 2022

살아간다는 것은 준다는 것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사실, 살아가며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남들을 위한 일이다. 내가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를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나를 위한 운동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소비행위를 하는 것 정도가 오로지 '나'를 위한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외에 무언가 사회적인 역할을 하고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뜻이다.

가령,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의미를 전달하며, 그들의 시간을 가치있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통한다. 글쓰기를 오로지 나만을 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출판하고 공개되면 일정 부분 그것은 타인을 위한 일이 된다. 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누군가를 응원하고, 그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이 된다. 

그밖의 모든 서비스직은 어쨌든 '고객이 만족'하게 하는 일이다. 친절이든 실력이든 비전이든 그 무언가로 고객이 만족하게 하기 위한 일인 것이다. 그 외의 수많은 일들도 사실은 핵심이 '나'라기 보다는 '타인'에게 있다. 물론, 나는 그로부터 부수되는 보수나 대가를 얻지만, 그 일 자체의 속성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타인의 만족, 타인을 위함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능력이나 실력이 있고, 일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타인을 만족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글쓰기나 예술, 강의나 수업, 변호나 대리, 사무나 회계 처리, 의료 등 그 무엇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타인이 행복하거나 기쁘고, 타인이 빛나고, 타인이 만족과 웃음을 얻을 때, 그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전환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대체로 우리는 자기를 위한 자기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실력이라 부르는 건 타인을 위한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모든 일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 관점을 이해해야, 우리는 나의 능력과 실력으로 그 무언가를 생산하여 타인에게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타인이 주는 것을 소비하는 사람으로만 머물게 된다. 

삶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에는, 누군가 주는 것을 받아서 소비하는 입장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면서 생산하는 입장이 있다. 그 중 우리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는 삶이란 자기 이익을 '얻는' 것이고, 이기적으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거의 반대다. 우리는 줄 때 자기 자신이 된다.

생산이라는 것이 꼭 사회적 역할로만 이야기될 필요도 없다. 가령, 누군가는 가족이나 자식 등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생산자가 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얻는다. 그럴 때도 핵심은 '주는 것'에 있다. 그를 통해, 얻는 것들은 차라리 '부수적인' 것에 가깝다. 돈이나 이익, 보상, 아이를 통한 대리만족 같은 것들은 부수적인 포상이지, 삶이나 그 행위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주는 존재로서 삶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비도 필요하기 때문에, 얻는 것 없이 주기만 할 수는 없다. 주는 행위에도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결국 끝없이 주고 받는 그 순환에 있다는 것, 특히 나를 계속하여 내어줌으로써 삶을 얻는다는 것, 삶의 모든 의미있는 역할이나 가치있는 일들은 '줌'을 핵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지 않으면, 삶은 움직이지 않는다. 삶이 생동하는 것은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순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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