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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Nov 04. 2022

외로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Photo by Noah Silliman on Unsplash



며칠 전, 기이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주위의 그 누구든지 붙잡고, 그 사람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당신 많이 외롭지 않냐고 물으면,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만 같다는 상상이었다. 그것이 내 기분 탓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외로운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그 외로움을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아주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혹시 너무 외로운 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틀림없이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믿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읽고 있는 책에서는, 외로움이 우리 몸에 만들어내는 호르몬은 우리가 공격받을 때 흐르는 호르몬과 같다고 했다. 외로움이 보내는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은, 우리 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과 같아서 우리는 싸우고 싶은 마음이 된다고 한다.


사실, 내가 20대에 '분노사회'라는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분노와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가 그 무언가를 돌볼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존중받지 못하거나 아무도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나의 일이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사회로부터 단절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 그 모든 건 외로움이 되고 분노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하나 필사적으로 애쓰는 건 타인들을 존중하는 일이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들은, 내가 무심코 타인에 대한 존중을 놓아버렸을 때이다. 나 자신이 무례하게 느껴질 때, 내가 가장 싫거나 후회스럽다. 건방지거나 거만하게 굴며 타인을 소외시켰다고 느껴질 때, 수치심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그 순간 그를 더 외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내가 주최하는 글쓰기 모임 같은 자리가 있으면,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가능한 한 동등하게 대하려 애쓴다. 거의 비슷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해주고, 하게 하고, 가능한 한 차별없이 객관적으로 대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라서가 보다는, 단 한 사람도 그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싶어서다.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누군가를 더 외롭게 만들거나, 내가 더 외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해서다. 


언젠가부터 내가 하는 글쓰기도 그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보다는, 그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로 심하게 기울어간다는 걸 느낀다. 몇 년 되지 않은 일인데, 아마 내가 이 사회의 '외로움'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하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사회는 외로운 사회다, 모두가 외로워하고 있다, 이 외로움, 찢어짐, 벌어짐, 멀어짐을 붙잡아야 한다, 비난이 아니라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런 내 안의 요구를 매우 강하게 느낀 시점이 있었다. 


우주가 팽창하며 멀어지는 별들처럼, 사람들이 멀어지는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은 정확히 그와 반대일 것이다. 서로가 다시 존중받는다는 느낌, 낯선 타인이 나에게 친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 당신이 나를 배려하거나 인격적으로 대우할 수 있다는 기대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코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마음이 이해받고야 마는 그런 미래로 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그것만이 유일한 길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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