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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Mar 02. 2023

행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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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가 수험 생활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절 나는 너무나 쉽게 행복해 했다는 것이다. 그냥 같이 저녁에 백화점에만 가도, 잠깐 동네만 같이 걸어도, 근교에 짧은 나들이만 떠나도 내가 행복하게 활짝 웃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요즘에는 그렇게까지 활짝 웃는 일은 잘 없고, 행복하기 더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수험생활은 인생에서 가장 갑갑했던 시절이고, 종일 제대로 쉴 수도 없이 경쟁과 공부에 몰두하며 불안과 싸워야 하던 때였다. 그러나 아내 말대로, 그때처럼 쉽게 행복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 한 곡에, 어쩌다 시험 기간이 끝나고 본 영화 한 편에, 집 앞으로의 저녁 산책 같은 것으로, 삶에서 가장 농도 깊은 행복을 느꼈던 듯하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그 시절 썼던 책의 제목에는 유일하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마찬가지로, 그 시절 썼던 글들을 모은 책은 '사랑 에세이'를 표방하고 있다('너는 나의 시절이다'). 사실, 그 시절에는 수험 공부 뿐만 아니라, 육아에, 집안 문제, 경제적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삼중고, 사중고로 몰아 닥치던 때였는데, 그럴수록 나는 황야에서 생쥐를 찾는 독수리처럼 사랑과 행복을 집요하게 응시했던 것 같다. 행복은 거기 있어야만 했다. 


모르면 몰라도, 내게는 마치, 공주를 지키는 기사처럼, 삶을 지키고 사랑해야 한다라는 의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간이란 누구나 본디 그럴지도 모른다. 트러플 버섯을 찾아내는 돼지처럼, 사람은 사실 행복이나 사랑에 대한 본능적인 후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도, 가난한 단칸방에서도, 실패와 좌절의 시대에도 결국 자기의 행복을 찾아내는 본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다른 걸 소비하거나 즐길 시간 따위는 거의 없었지만, 건조하게 공부하고, 이따금 쉬면서 글을 쓰고, 가족과 사랑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쥐어 짜내던 그런 단순한 삶이 가장 행복에 가까운 조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삶은 몇 십배는 더 복잡하다. 끝없이 소비해야 할 것들, 얻어야 할 집이나 떠나야 할 휴가, 온갖 수입과 지출, 의무들, 아이나 우리의 미래, 복잡다단한 현실 같은 것들이 행복을 덜 명료하게 만들곤 한다. 그 모든 걸 내려놓고 '활짝' 웃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금요일마다 맥주나 와인을 마시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행복은 아주 어려운 문제다. 인류는 문명의 탄생 이래, 수천 년간 행복과 고통의 문제에 골몰해왔다. 어느덧 우주선을 화성까지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인류의 행복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려운 행복은 삶의 더 많은 조건들을 얻고, 더 복잡한 의무들을 만들고, 더 화려한 것들을 무작정 소비할수록 더 명료하게 얻어지는 건 아닌 듯하다. 돌아보면, 지난 삶에는 반드시 인생의 힌트랄 게 있기 마련이다. 그 힌트 어디에도 복잡하고 많은 조건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인생을 구성하는 것들을 당장 다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결단을 하는 수도사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어리석어서 곧장 그 명료하고 단순한 삶으로 들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삶을 계속 다시 바라보는 그 시각과 태도 만큼은 더 자주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삶의 행복은 조건 보다는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더 자주 기억해야겠다고 말이다. 사실 행복은 여기 있고, 나의 시절도, 나의 사랑도, 나의 삶도 여기 있다. 이것을 모른 채 자꾸 지나친다면, 공주를 곁에 두고 애꿎은 풍차에 들이박는 돈키호테와 다를 게 없다. 삶에는 분명 더 나은 태도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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