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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ul 05. 2023

돌봄에 대한 취향


어릴 적부터 나에게는 돌봄에 대한 취향이랄 게 있었다. 어머니 말로는, 나는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돌보는 걸 재밌어 했다고 한다. 분유를 내가 먹이겠다고 젖병을 빼앗고, 유모차도 내가 끌겠다고 했다는 모양이다. 꽤 크고 나서도 여동생을 아끼며 돌봤던 기억이 난다. 매일 손잡고 학교를 데려갔고, 돌아오는 길에 군것질을 하면 반은 남겨오고, 친구들과 노는 데도 늘 데리고 다녔다. 


돌봄에 대한 또 다른 기억으로는 병아리가 있다. 십대 때 어느 날, 다른 아이들이 버린 병아리들이 내게 오게 되었는데, 무척 지극정성으로, 하루종일 병아리 생각만 하며 돌보았던 기억이 있다. 매일 땅파서 애벌레를 잡아주고, 산책하고, 바다와 들판에도 데려가고, 심지어 같이 등산도 하고, 항상 곁에 두고 잘 정도로 병아리를 아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 집에 왔던 유기견이 있었고, 또 그 유기견이 낳았던 새끼들이 있었다. 그 젖먹이들은 내 방의 책상 밑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손가락에 우유를 찍어서 빨게 하면서 강아지 새끼들을 키웠다. 모르면 몰라도, 그렇게 '돌봄'에 들어설 때는 세상 다른 모든 게 재미 없을 정도로, 하루종일 그 존재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머릿속에는 병아리와 강아지 생각 뿐이었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먹이고, 놀아주고, 집을 더 근사하게 지어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돌봄에 대한 취향은 꽤 여러 형태로 이어졌는데, 때론 후배들을 아끼거나, 여자친구를 돌보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방식으로 변주되곤 했던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돌봄의 선두주자는 나였는데, 초기 육아는 사실 내가 주도해서 했다고 해도 아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점점 그 비율은 여러 방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돌봄을 좋아하는 사람인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스스로 돌봄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돌봄을 좋아한다는 것이 꼭 선하거나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돌봄도 취향의 일종이다. 그리고 거기엔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있기 마련이다. 가령, 병아리나 강아지를 돌볼 때는 그 존재들을 아끼는 만큼이나 그 존재들에 대한 소유욕도 강하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 돌봄과 소유, 때론 지배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진다. 나아가 내가 어떤 존재를 키우는 일에는 그 자체의 즐거움이 있어서, 사실은 나 좋자고 하는 면이 없지 않다. 게임 캐릭터 키우듯 재밌으니까 하는 것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 와서는, 여러모로 이 돌봄의 취향에 대해 스스로의 자각과 한계, 선을 지키기도 한다. 가령, 내가 돌보는 걸 좋아해도 모두를 돌볼 생각은 없다. 이것저것 다 돌보면 재미는 있겠으나, 나름대로는 꽤 엄격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편이다. 그리고 돌봄이 무조건적인 이타성이 되지 않게, 오히려 이타성과 이기성의 조화 가운데 존재하게끔 스스로 애쓰려고도 한다. 무조건적인 헌신이 아니라, 더 정확히 당신을 위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 되게 하려고 한다. 삶은 그래야만 지속 가능하게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돌보고, 키우고, 누군가에게 기여하고, 그들이 '나'로 인해 잘되는 걸 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취향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삶은 취향대로만 사는 것은 아니고, 취향이 언제나 옳은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 겉으로는 단순한 취향이랄 것 속에는 무의식적인 온갖 욕망들이 뒤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무작정 취향만 따르기 보다는, 더 정확하게 삶을 설계하고 운용할 필요를 느낀다. 세상에는 되는대로, 제멋대로, 공중을  떠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살아도 되는 삶도 있겠지만, 내 삶은 보다 정확하게 책임지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무튼, 이 돌봄에 대한 취향이 나를 너무 소진시키거나 낭비시키거나 뒤흔들지 않으면서도, 내가 적절하게 이 취향에 따라 살 수 있는 여러 삶의 방식들을 고안하는 게 내게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삶이란 결국 자기 기질 혹은 취향이랄 것과 그것을 다스리는 현실적 고민의 조율이 만들어낸 흔적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란, 막연히 사막 위에 그려나간 여정이라기 보다는, 자기만의 기질로 조금씩 자기의 세상을 물들여 나가면서 얼룩지게 한 투쟁과 조율 같은 것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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