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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20. 2024

손해를 보면 죽어서도 귀신이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손해'이다. 사랑은 손해를 이길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손해보는 사랑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보다도 손해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참거나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손해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손해 앞에서는 내 안의 모든 분노와 증오를 끌어낼 수도 있다. 손해는 신앙이 되었다.


요즘 연애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손해보지 않는 것이라 한다. 조금이라도 손해보면, 지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와 나의 손익이 1:1로 정확히 맞추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있으면, 성격 차이로 인한 파혼 사유, 이혼 사유도 된다. 우리 사회는 손해가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사랑도 손해를 이길 수는 없다.


친구 사이가 틀어지는 많은 경우 역시 '손해'가 발생했을 때이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익명 게시판에 풀어놓으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그런 손해보는 관계를 맺느냐고 타박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나.'라는 질문 자체가 기이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손해는 절대신이 되었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멍청하고 순진한,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교통사고가 나면, 상대방이나 보험회사에게 뜯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뜯어내야 '현명한' 것이다. 적당히 넘어가주거나, 덜 청구하거나, 덜 받아내면 그야말로 손해의 신에게 사죄하고 할복해야 마땅하다. 인생 최대의 후회는 과거에 손해봤던 선택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가치관, 세계관, 윤리관 등 어떤 '문화'가 남아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 '손해' 하나가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다.


손해의 결정판이 있다면 육아와 부양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어린 존재든 늙은 존재를 책임지며 희생하는 건 그야말로, 이 손해라는 신이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악마의 행동이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경계를 지키면서, 타인을 자기의 손해 범위 안으로 들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손해주의 사회'가 완성되고 있다. 그야말로 손해보지 않는 데 있어서는 천재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되어가는 데는 '손해' 본 경험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누군가에게 너무 부당하게 이용당하거나, 갑질 당하고, 믿었다가 배신 당하고 사기 당한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우리는 손해를 필사적으로 막는 게 우리 자신을 지키는 법이라고 믿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모두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권'을 행사하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방어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회로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어의 반대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누군가는 죽음의 공포에 필적할 수 있는 '손해보는 공포'를 감내하면서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죽기보다 싫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누군가에게 양보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난인 손해를 참아내면서,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이라며 욕 먹고 돌 맞아가면서, 손해보며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더 이상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삶은, 죽을 때까지 동전 한 푼의 손해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죽을 때도 편하게 눈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손해 보면 죽어서도 귀신이 된다. 그게 손해가 신이 된 사회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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