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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Mar 09. 2024

만화 500장을 폐기한 '드래곤볼' 토리야마 아키라



'드래곤볼'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는 공모전에 줄줄이 떨어지고, 1년간 500장 이상의 원고를 폐기당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최고의 만화가로 입지를 다졌고, 한 때 일본에서 10대 부자가 될 정도의 전설적인 만화가였지만, 그도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특히, 간신히 데뷔한 뒤에도 첫 만화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드래곤볼'조차도 처음에는 별로 인기있는 만화가 아니었다고 한다.


대개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인의 모습이란 그렇다. 나도 거의 기억이 시작된 유년기 때부터 드래곤볼을 좋아했는데, 그 때만 해도 드래곤볼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때였다. 우리나라에 만화가 수입됐을 때 이미 그는 '성공한 만화가'였던 것이다. 우리가 동네 친구가 아닌 그 누군가를 알게 될 때, 그는 그 이전의 어둠 없이 빛만 받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지리멸렬한 시절, 텐션이 아직 오르지 못한 시절, 흐름을 타기 위해 애쓰던 시절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드래곤볼'을 떠올리면, 요즘 만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지리멸렬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수련 과정, 준비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이어인들이 쳐들어올 때까지 손오공, 크리링, 피콜로, 손오반, 야무치 등이 수련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게 이어진다. 어릴 적에는 '사이어인 언제 쳐들어오나.' 했던 것 같다. 요즘 만화들은 이런 지리멸렬한 과정은 거의 '스킵'하듯이 한 화 안에 처리된다. 그러나 드래곤볼은 그런 시간들을 무척 길게 다룬다.


이런 만화의 특성은 알게 모르게, 편집자에게 수많은 퇴짜를 맞아가고, 폐기처분 당하고, 수정 요구를 받아가면서 힘들게 견뎌낸 시간이 반영된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그는 <닥터 슬럼프> 연재도 그런 과정을 거치며 매우 힘들어 했다고 한다.). '사이다'같은 빠른 전개가 대세인 시대, 전지적인 존재가 전생하거나, 거의 전능한 존재가 되어 환생하는 식의 통쾌한 이야기가 대세인 요즘에는 '고구마' 같은 지리멸렬한 이야기라며 배척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원래 사이다 보다는 고구마에 가깝다.


원고를 몇 백장 정도 폐기처분당해보지 않았다면, 좌절하긴 이르다. 이제 겨우 무언가를 시작하는 단계라면, '초심자의 행운'이 살짝 끼어들진 몰라도, 대개는 안 되는 게 정상이다. 처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소년급제는 저주'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든 단단하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토리야마 아키라는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 '드래곤볼'을 연재할 때는 10년 간 한 번도 휴재를 하지 않는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얼마 전, 드래곤볼 연재 40주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전까지 그는 45년 이상 성실한 만화가로 창작 활동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그가 연출 기법이나 스토리 전개 등 만화계에 남긴 성취는 가히 전설이라 부를 만한 정도였다고 하나, 사실 진짜 중요한 건 '45년'이라는 숫자 같다는 생각도 든다. 45년 간 성실하게 창작활동을 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무언가를 말해준다. 한 삶을 진정성 있게 완수하고자 한다면, 45년 정도는 무언가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령 10대 부자는 될 수 없더라도, 한 삶을 제대로 살아낸 존재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삶을, 자기의 마음을, 그 정도는 믿고 나아가볼 만한 것이다. 한 번 뿐인 삶에 배팅을 한다면, 45년 쯤은 내가 하고자 하는 걸 밀고 나가 보겠다는 믿음 쯤은 가져볼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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