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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17. 2021

연결의 평등


문득, 어떤 풍경이 참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의 테라스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원한 저녁에, 맛있는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서로 마주보며 맥주를 마시면서 침을 튀기며 무언가 열중하며 떠들고, 깔깔대고, 곁에 앉은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는 풍경이 말이다. 딱히 거리랄 것이 없는 밤, 오히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서는, 그 약간의 소란스러운 공기를 흡입하는 어떤 순간이 참 소중한 것이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요즘에는 어디를 가나, 거리두기와 서로에 대한 경계심으로 어디에서도 그리 자유로운 느낌을 받기 어렵다. 그러고보면, 사실 자유로움이란 타인들 속에서 어떤 안심 혹은 괜찮음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그들이 위험하지 않고, 그들과 어떤 분위기를, 더 직접적으로는 합께 호흡하는 공기를 공유할 수 있는 상태, 그래서 한 걸음 건너에서 오는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상태가 자유로움이었을 것이다. 공원에서 같이 별을 올려다보던 사람들, 한 걸음 건너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 한칸 옆에서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의 존재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자유에 더 가까운 상태라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거나 신기하기도 하다. 


거리두기의 시대 속에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 갑작스레 유행하고 있는 음성 기반 SNS도 사실은 대화가 그리운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한 때,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무수한 저녁 모임들, 사람과 사람이 그만 좀 만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많았던 대화 자리들, 취향 공동체들, 회식 자리들이 썰물처럼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골방에서도 다시 그 누군가와의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사람은 하루에 몇천단어에서 몇만단어를 말해야 하는데, 그런 단어수를 채우지 못하면 우울증에 이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는 어떻게든 서로가 연결될 또다른 가능성들을 부지런히 찾아나가고 있지만, 노년 세대의 입장은 더 극심한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기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도 든다. 명절에도 집합금지로 자식들을 볼 수 없고, 동네 노인정이나 마실도 모두 문을 닫고, 종교시설조차 찾아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노인들은 그저 종일 TV나 보다가, 마스크 끼고 집 앞에 잠시 나갔다 오는 게 전부일 것이다. 사실, 젊은 세대를 위한 커뮤니티들이 늘 소비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커뮤니티가 가장 필요한 건 노년 세대다. 청춘의 고독은 때로는 일부러라도 거쳐보게 되는 방황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노년의 고독은 인생 최후의 고립이나 고독사로 이어진다. 


사실, 음성 기반 커뮤니티 같은 것은 노년 세대에게도 무척 유용한 소통 통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꼭 특정 SNS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서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모색되면 좋겠다. 어쩌면 정부가 할 일이란, 그렇게 서로 단절과 고립이 심해지는 사람들을 계속 이어줄 수 있도록 애써주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사람은 연결되어 있어야만 하는데, 그 연결이라는 것도 특정 세대에게는 더 가혹하고 어려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가족과 마을, 동네가 사라진 자리에는 온라인과 익명의 커뮤니티, 느슨한 연결이 남았는데, 아직 과거의 관계 방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관계나 연결 자체를 박탈당하고 있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며 살아가는 것도, 결국에는 다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이고, 덜 외롭게 되기 위해서이고,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외로움은 실제로 사람의 지능과 판단력을 떨어트리고, 치매나 정신건강, 나아가 신체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갈 것 없이도, 누구도 외로움 같은 건 얼마든지, 영원히 손쉽게 견뎌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더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특정인이 가지는 연결의 과잉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연결의 평등,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할 연결의 분배를 의미할 것이다. 연결이 간절한 사람들에게 연결이 있기를,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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