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해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도하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길 만큼 깊이 이해할 수도 있다. 그의 환경, 인생 여정, 당시의 상황, 내면의 결핍 등 온갖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매도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가 아무리 인간 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존재일지라도, 밑도 끝도 없이 매도할 수 있다. 그의 이타적 행동은 알고 보면, 깊은 자기 만족에서 오는 이기적 행위이다. 그가 이렇게 착하게 살 수 있는 건, 부유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착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다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고, 아프리카 아이의 인권이나 닭의 동물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사실 차별주의자다. 무엇이든 다 갖다 붙여서 매도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는 일에 큰 관심이 없어졌다. 그 대신, 나랑 잘 맞는 사람인가,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인가, 나랑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차피 그 누군가가 내 기준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때려 죽여도 부족할 사람일 수 있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참 좋은 변호사가 상대편 당사자에게는 원수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참 훌륭한 회사 대표가 그 직원한테는 원망스러운 상사일 수도 있다.
그런 세상사의 복잡한 욕망들 속에서,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라 규정하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다고 느낀다. 선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안에 이기적인 탐욕이 있기도 하고, 악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무자르듯이 선인과 악인을 나누기 쉽지 않다고 많이 느낀다. 그냥 나는 내 선에서 개인적인 호불호를 판단하고, 가까이하거나 멀리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그냥 판단중지를 내리고, 그저 나 자신이나 잘 반성하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사람에 대한 판단도 너무 쉽게 내려서는 안된다고 느끼기도 한다. 내가 섣불리 누군가에 대해 내린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거듭 만나보고,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보고, 그의 생각이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최초의 내 편견을 넘어서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오히려 편견을 갖고 빠르게 판단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사람은 깊게 사귀고 볼 일이다.
요즘 사회를 한 마디로 하자면, 그야말로 손쉬운 판결과 매도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잘 모르는 샐럽에 대해서도, 그가 한 말 한 마디, 어록 하나 어디서 듣고 악플부터 쓰기 바쁘다. 흥미로운 소문들은 늘 손쉽게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런 몰이해의 세상에서는, 하나의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고 느낀다. 찬찬히 들어보고 이해하기, 라는 것 만큼 이 시대의 독을 치료해가는 첫 단계가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