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독자를 만나다
여행책을 쓰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판 한달살기』 라는 책을 2018년도에 출간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했었던 여행이니 벌써 9년 전의 일이며, 책 출간하는데까지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세계 여러 나라 곳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여행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출판사의 제안으로 출간을 하게 된 책이다. 사실 1쇄밖에 팔리지 않은 책이고, 이후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여행객이 줄고 여행책 시장도 축소되었다. 어쩔 수밖에 절판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더 이상 책은 찍어내지 않았다. 1쇄에 대한 인세만 받았던 매우 초라한 성적의 책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2024년 1월 사이판에 또다시 한달 살이 여행을 왔더니 사이판 장기 여행을 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분들이 죄다 『사이판 한달살기』 책을 읽고 온 것이다. 책에서 소개했던 게스트하우스를 한 달 살기 숙소로 정하고, 현지 학교 등록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한 달 살기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책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역시 책을 쓰기 잘 했다는 판단을 한다. 어떤 글은 그 당시에 평가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 진가를 알아줄 때도 있고, 우연한 곳에서 독자를 만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사이판 한달살기』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썼던 책이 아니며, 내 인생에 큰 보탬이 될 거라는 큰 희망과 포부를 품은 책도 아니었다. 그저 사이판이라는 여행지에서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일기처럼 매일 기록을 했던 글이었다. 매일 잊어버리지 않게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루에 10분, 20분 짬을 내어 그날을 되돌아보면서 있었던 하루를 정리한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내 마음까지 담아낸다.
예전에 광화문 교보문고였나 용산의 영풍문고였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매대에 올려 놓려진 책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둔 적이 있다. 바로 그 때 책의 표지를 누군가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달씩 해외 여행을 한다고?”
“남편이 돈 잘 버나 보다...”
“애 데리고 한 달이나 해외여행을 다니려면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해?”
“이런 책 읽는 사람들이 있을까?”
“뭐 누군가는 이런 한달살기 책 읽고 따라하고 싶어서 한달씩 여행을 또 가겠지?”
“애 키우기 편하다, 편해”
아마 아이가 없는 사람들의 시시껄렁한 농담같은 대화였을지 모른다. 이 순간 나는 하마터면 말대꾸를 하면서 싸움을 걸 뻔했다. 얼굴은 이미 잔뜩 찌푸린 상이 되었고, 기분도 일그러졌다. 입 밖으로 수많은 말을 내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말을 삼켰다. 책이 꼭 나와 같은 인격체일리는 없다. 책을 읽고 평가하든 읽지 않은 채 표지와 제목만 보고 평가하든 그것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남의 생각에 뭐라 왈가왈부 할 자격은 없다. 그들의 생각과 취향일 수 있다.
『사이판 한달살기』 책을 읽고 정말로 사이판 여행을 오게 된 사람들을 여럿 만나고 나니 약간의 자부심이 생긴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이를 데리고 해외에서 머물고, 여행을 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닐 수 있다. 자신의 상식 혹은 틀을 벗어나야 하며, 안전지대에서 물러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상황에 자신을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장기 여행을 하는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고 멋지다고 평가하고 싶다. 나에게는 성적이 저조했던(?) 책으로 기억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해 준 ‘방아쇠’같은 책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어떤 분은 이 책을 가족 모두가 읽고, 아이들까지 읽으면서 사이판 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꼭 가 보고 싶은 여행지가 되었고, 심지어 사이판에서 책을 쓴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그 집 아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설레어했다.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독자의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책에서 무엇을 읽고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뻔해 보이거나 하찮은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뻔함’ 너머에 있는 세계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경험을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분명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 거기다가 책을 출간하기 위해 글을 쓰고, 경험을 재구성했던 모든 과정은 의미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나는 책을 내고 작가가 된 이후 오히려 책을 쓴 작가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책과 작가에 대해 독설을 날리는 것으로 함부로 누군가의 인생을 재단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예리한 비평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이러니 저러니 비판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든 나 역시 그러한 비평의 도마에 오를 수 있게 되니깐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혹한 평가가 겁을 내어 글을 쓰지 않는다거나 책 내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을 솔직하게 끄집어 내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하는 일을 이어나갈 뿐이다.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마음을 감추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밖으로 표출하면서 내 안의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글을 쓰면 된다. 이것은 글을 쓰는 자의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