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인간상이 있다. 바로 '통제 욕구'가 매우 강한 인간상이다. 특히, 자녀에 대한 통제욕구가 지나친 부모나 직원들에 대한 통제욕구가 강한 회사 대표 등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가 보는 책마다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본인의 불안을 견딜 수 없어서, 타인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경우, 대개 그 타인은 지옥을 맛보며 철저하게 인격과 인생을 파괴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떨쳐내기 힘들다. 어릴 적에는,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랑 놀기만 해도, 질투를 느끼거나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조금 크면서, 연애를 하다 보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연락은 기본이고, 혹여라도 오늘 밤 상대가 연락이 안되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자녀가 태어난 이후에는, 걱정 반, 불안 반으로 혹여나 자녀가 다칠까봐, 나쁜 것에 물들까봐, 혹은 내 기대만큼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할까봐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아마도 이런 통제 욕구의 문제는 인류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유독 문화적으로 심각해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는 통제 중심의 교육이나 양육 환경 때문일 수도 있고, 서로에 대한 참견이 강한 집단주의의 잔여물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통제당하는 지옥을 맛본 사람들과 동시에 그렇게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내는 통제 지옥이 꽤나 광범위하게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함께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와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의 콜라보 북토크를 한 이지안 작가는 '자기 허용' 혹은 '자기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여러 강박적인 틀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 해방'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학 비폭력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해 보인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은근히 '가스라이팅'하며 통제하여 나의 불안을 떨쳐내려는 습성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상당히 '허용적'으로 큰 편이라 생각한다. 부모님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대체로 하게 내버려 두었고, 폭력적으로 강요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중학생 쯤에는 맨날 밤새서 게임하느라 키도 별로 못 커서, 지금의 키가 15살 때 키로 멈춰 있다. 고등학교 때도 밤새서 소설 쓴다고 할 때, 공부 안하고 그런 걸 하느냐고 뭐라하는 걸 들어본 기억이 딱히 없다. 대학생 때부터도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거의 10년 간을 학생이자 백수처럼 지냈지만, 주로 들은 말은 '너를 믿는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아이를 다소 허용적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이거 안 되고, 저거 안 되고, 이래선 안되고, 저래선 안된다 보다는 일단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같이 해보려고 한다. 또 내가 정작 조금 불안해도 아이가 혼자 놀이터에 놀러가는 연습도 하게 한다. 얼마 전에는, 혼자 편의점에 보냈는데 아주 멀리서 몰래 따라가긴 했지만, 아이에게 자율성을 가르쳐주고 싶었다(아이가 가는 길 중간쯤에서 패닉에 빠져 결과적으로 따라간 건 잘한 게 되긴 되었다). 그런데 이건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일 듯하다.
타인을 타인대로 내버려 두어도, 내가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타인이 타인의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내가 소외된다고 느껴선 곤란하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챙기며 배려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모든 관계의 붕괴가 시작된다. 지나치게 통제당한 자녀는 언젠가 정신적인 문제를 앓으며 부모를 원망하게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때론 약간의 아픔을 느낄지라도, 서로 간의 거리를 인정하며 기다려주고 지지해주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서로에 의존하면서도 독립적이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관계에서의 '존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