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나는 어디에서도 나를 찾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 속에 인정하기 싫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속한 곳도 없었고, 속할 곳도 없었다. 글쓰기 하나는 자신 있었지만 언론사 시험에는 줄줄이 낙방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저 현실로 뛰어들 거라며 호기롭게 대학원을 뛰쳐 나왔지만, 내가 갈 곳은 취업 스터디 정도 밖에는 없었다.
당시에 나름대로 책을 꽤 여러 권 쓴 작가였지만, 딱히 나를 찾는 곳은 없었다. 강연이나 북토크 같은 건 아무래도 더 유명한 다른 작가들 몫인 것 같았다. 서너달쯤인가, 동네 도서관에서의 강의 요청도, 잡지에의 기고 요청도 하나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데, 나는 모든 걸 잃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자주 왜 남들처럼 살지 못할까,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왜 남들처럼 대학원에 일찌감치 들어가 논문을 받을 때까지 뚝심있게 공부하지 못한 걸까. 왜 내 주변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일찍이 취업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 못할까. 왜 나는 문학이나 글쓰기를 하겠다며 20대를 통째로 보냈을까. 지난 날들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 자신이나 나의 삶을 무한하게 믿을 수도 없었다. 취업 준비와 더불어 도전해봤던 로스쿨 입시에도 한 번 떨어졌을 때는 더 그랬다.
그러나 그 시절, 그렇게 멈춰있고 싶지는 않았다. 돌파구라는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것이라 끈질기게 믿었다. 언론사 취업 스터디를 하면, 스터디원들과 매일 글을 써서 서로 돌려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사 이슈에 대한 칼럼이나 여러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많이 쓰게 된다. 나는 그렇게 쓴 글들을 부지런히 언론사에 보냈다. 사실, 이런 '무작정 투고'를 받아줄 거라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한겨레, 경향 같은 신문사들에서부터 조금씩 받아줬다. PPSS 같은 웹진에도 그렇게 글을 싣게 됐었다.
그리고 취업 과정에서의 좌절에만 몰두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책을 썼다. 그 시절 두 권의 책을 어떻게든 써내고 말았는데, 그게 <고전에 기대는 시간>과 <부모사용설명서>다. 이런 일은 가성비에 있어서는 가히 최악의 일이다. 1년 내내 두 권의 책을 써서 얻는 인세라야 몇 백만원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책을 쓰는 시간이 나를 견디게 했다. 희망을 갖게 했고,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줬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여러모로 바쁜 시절을 보내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다. 그럴 때면, 그 8년 전의 외로움과 공허감, 불안을 떠올린다. 여전히 불안한 시절들이 이따금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쌓아온 삶이 조금은 더 나를 단단하게 다져주었다고 믿게 된다. 바쁘고 힘든 것도 감사하게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 당시 그렇기 집요하게 걸었던 시간들이 10년 뒤의 지금을 만들었다는 생각도 든다. 가령, 그 시절 거의 반 억지로 써냈고, 그리 많이 팔리지도 않았던 <고전에 기대는 시간>이었지만, 그 책을 기반으로 지난 8년간 고전에 대한 강의를 제법 많이 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 책을 기반으로 고전 문학 강의 요청을 받는다. 10년도 전에 어떻게든 써냈던 <분노사회>를 아직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려운 시절 어떻게든 삶을 견뎌내기 위해 해냈던 일들이 조금씩 쌓여 삶을 다져주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시절일수록 자기 안의 무언가를 믿고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집요하게 '내면의 용기'를 따르라고 했는데, 종종 그 말이 생각난다(이 이야기는 우치다 타츠루의 최근작 <무지의 즐거움>에서 강조하여 다시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삶에는 나의 내면에도 빛이 있다고 집요하게 믿고, 그 빛을 쫓아야만 하는 시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