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시간은 가고, 세월은 흐른다. 수험시절, 내가 가장 절실하게 배웠던 삶의 진리다. 아무리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삶을 무너뜨릴 것처럼 위협하고, 때론 거대한 압박감과 부담감으로 오더라도, 결국 다 지난 일이 된다.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서, 결국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과 걱정, 스트레스도 먼지 같이 털어버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 지난 일이 되고, 나는 살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갈 길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기차는 달리고, 다 지난 일이 되게 하려면, 자신의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자기의 길이 없으면, 그 자리에 고여 버리게 되고 문제와 함께 썩어버린다. 한 때 내게는 매일 직장에 출퇴근하는 게 가장 큰 위안이었다.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쨌든 나는 오늘 출근하고, 내일도 출근하며 내 길을 가는 것이었다. 문제가 내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목덜미를 움켜쥐어도 나는 내 일을 하러 가면 되었다.
그것은 꼭 직장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있으면 된다. 가령, 내 주위의 온갖 것들이 귀신처럼 나를 바닥에 주저앉히고 잡아먹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할지라도, 내게 몰두할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내가 반드시 써야하는 논문이나 책이 있다든지, 출전해야 할 시합이 눈앞에 있다든지, 짓고 있는 건물이 아직 있다면, 나는 그 일을 하면 된다. 그것이 때론 삶을, 사람을 살린다.
그러니 역시 사람은 자기의 일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 삶에서 무슨 일을 해야할지,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이 내 길을 밝혀줄지, 어떤 일이 나의 하루하루를 쌓아 미래로 데려갈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자신의 일이 있다면, 인간은 이 삶이라는 정글을 넘어갈 수 있다. 어느 날, 아침의 창백한 햇살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밤이 끝나고 맞이한 아침에서, 그래, 끝났구나, 여기까지 왔구나, 하며 투명한 하루로 걸어들어갈 수 있다. 비로소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날이 온다.
저마다의 삶에는 그를 살리는 일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 일은 그의 생활을 지탱하면서, 삶에 의미를 주고, 오늘을 견디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끝도 없이 떠나는 여행이 그의 일이다. 여행길을 걸으며 그가 속해왔던 모든 현실은 점점 탈색되고 벗겨진다. 그 앞에는 계속 걸어가야 할 길만이 햇살을 받고 있다. 삶에서 일은 때론 그런 여행을 닮았다. 계속하는 일이 그를 투명하게 만든다. 다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그가 걷는 발걸음 소리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