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구선수니까요 (feat.강백호 in 슬램덩크)
<슬램덩크>에서 유창수는 강백호를 유도부에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질문을 한다. 사실, 너는 농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채소연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잖아, 농구한다고 해서 채소연이 너를 좋아하게 되진 않아, 너에게 진짜 맞는 운동 종목은 유도야, 너의 자질이라면 유도로 정말 전국재패를 할 수 있어, 라며 어찌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이야기를 해준다. 나였다면, 가만히 듣다가 '맞아, 나는 정말 나와 어울리는 걸 해야지.'라고 넘어갔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집요한 유창수의 설득에도, 강백호는 '싫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그러다 유창수와 강백호는 승부를 겨루게 두고, 강백호는 배운 적도 없는 유도 기술을 이용해 유창수를 날려 버린다. 유창수는 그가 유도 재목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이런 데 도대체 왜 유도를 하지 않겠다는 거냐." 그러나 강백호는 말한다. "나는 농구선수니까요."
사실, 강백호의 대답은 대답이라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일종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농구선수인 것도 아니다. 뛰어본 경기라고는 팀 내에서 편을 갈라 하는 연습경기 하나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선취'하고 있다. 자기가 농구선수라 믿기 때문에, 아직 농구선수는 아니지만 이미 미래완료적으로 농구선수가 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은 농구선수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필요없다. 그냥 자기가 믿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은 자기가 믿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건 하지 않겠다고 한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몇 가지 이유를 떠올릴 수는 있다. 그래놓고선 역시 채소연 때문에 농구를 하는 거잖아,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채소연을 좋아하는 것과 농구를 하는 건 별개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유창수가 유도부에 들어오면 채소연의 사진을 잔뜩 주겠다고 하지만, 강백호는 이에 거절하기 때문이다. 채소연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농구를 하는 건 농구를 하는 거다. 강백호는 이미 농구선수가 되었다.
그 첫 계기는 채소연 때문이었다. 자기가 반한 여자 아이가 그에게 멋진 농구선수가 될 거라 했기 때문에, 그는 농구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안에서 채소현과 별개의 무언가를 느꼈다. 그는 차마 '농구가 좋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그러기엔 어쩐지 부끄럽지만, 농구를 좋아한다. 불량배였던 한 소년은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처음으로 알았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한 소년은 자기도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유령 같았던 자신의 존재를 농구선수라는 존재에 넣기로 했다. 그는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이 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 소년의 마음을 꺾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인생에서 잘하는 걸 해야 하나요,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다들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지 헷갈려하고 있다. 너무 많은 선택지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을지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한다. 강백호의 답은 심플하다. 내가 믿는 존재가 미리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대로 자기 내면에서 빛나게 된 그 별을 쫓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농구선수가 아닌 다른 것은 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릴라나 미워 죽겠는 여우 같은 녀석들이 있더라도, 그래도 나아가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스스로를 작가로 말하기엔 어딘지 민망하여 '쓰는 사람'이라든지 '글쟁이'라든지 하고 칭하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그냥 작가라고 말하고 다닌다. 누가 무어라 하든 나는 그냥 스스로를 작가라 믿으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마음은 열다섯으로 되돌아간다. 작가를 꿈꾸던 어느 친구와 밤이면 메신저로 늦게까지 글쓰기에 관해 떠들 때, 사실 나는 이미 작가 외에 다른 건 아니고 싶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넘도록, 나는 정말 매일 글을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