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나는 일종의 지식인 교양계층이 되고 싶었다. 10대를 지나오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라고는 게임과 만화, 판타지 소설 정도였는데, 20대의 나는 그보다 더 '고급 교양'을 아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클래식도 들어보고, 무용 공연도 가보고, 그리스 희곡도 읽어 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도 저 18세기 유럽의 지성인 같은 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인류가 쌓아온 지성의 산에는 가치 있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특히, 나는 고전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 사회학을 정말 좋아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체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진 않았다. 나는 지금도 10대 때 즐겨 봤던 만화들을 밤마다 즐겨본다. 여전히 웹툰 좋아하고, 모바일 게임을 하기도 한다. 많은 고급 공연, 전시, 문화는 지겨워서 나랑 맞지 않는다.
내가 하나 알게 된 것은, 역시 내가 20대에 꿈꾸곤 했던 그런 '고급 교양 계층들'의 삶이라는 것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만나서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다. 원피스나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호랑이형님 얘기도 했다가, 영웅전설이나 젤다, 파랜드택틱스 얘기 하고, 그러다가 니체나 지그문트 바우만 얘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가장 편안한 시간을 즐긴다.
말하자면, 나는 어느 시점 이후 스스로에게 하던 가스라이팅을 관두었다. 나는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내가 릴케로 환생하여 장미 꽃을 꺾어 여성들에게 시를 읊으며 선물할 수는 없다. 유럽의 살롱을 흉내내며 모여서 LP판으로 클래식 듣고 셰익스피어 희곡에 대해 이야기나눌 필요도 없다. 나는 이 시대의 나로서, 고유한 혼종으로서 내가 살아온 삶 전체를 긍정하는 나로 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끔찍한 것은 자기만의 이상을 정해두고, 그것을 옳음의 기준으로 정해둔 다음,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며 거기에 맞추려는 폭력이다. 그런 태도로는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진정으로 나아지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옳은 점과 그른 점, 아름다운 점과 추한 점, 고상한 점과 천박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타인들이 혐오스럽거나 천박해보인다면, 혹은 때론 나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면, 내 안에서 그 모든 걸 판별하는 궁극의 '기준'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삶이란 이 나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자리에서 피어올라서 저마다의 기준을 창조하는 일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일본 만화, 힙합, 게임, 판타지 소설, 웹툰을 좋아하면서 고전문학과 정신분석학을 읽는 밤을 사랑하며 오페라와 고전 무용은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좋아하는 법을 계속 배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