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치맘 패러디'가 일종의 화제가 되고 있다. 한 개그맨이 대치동 엄마의 삶을 패러디한 영상을 올린 것인데, 논란은 다른 것보다 주로 '패션'에 맞춰지고 있다. 첫 영상에서는 전형적인 대치맘의 패션으로 수백 만원에 이르는 몽클레어 패딩을 입고 샤넬 가방을 들고 나온 게 논란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고거래에 '몽클레어 패딩'이 1000건 넘게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후 영상에서는 밍크퍼 조끼랑 고야드 가방이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패러디로 등장하는 패션 아이템들이 갑자기 사람들의 거부 대상이 되면서, 입거나 들고 다니기 창피해지는 '무언가'가 되고 있다는 게 이 현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패션은 그 값비쌈 때문에 경쟁적으로 유행한다. 옷, 가방, 자동차, 각종 명품 등에는 "내가 이 정도는 살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자부심이 덧입혀지고,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봐주는 어떤 '가상의 시선'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가상의 시선이 '노골적'이 되는 순간, 거기에서 오던 만족감은 사라지고, 일종의 혐오감이 남아버린다는 점이다.
'수백만원짜리 패딩을 일상적으로 입고다닐 수 있는 나'라는 이미지는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한 과시를 통해 잔잔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일 때만 내게 뿌듯함과 우월감, 자존감을 준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돈자랑하기 위해 똑같은 걸 입는다는 인식이 퍼지는 바로 그 순간, 내게 자부심을 주었던 그 대상은 '극혐'의 대상이 된다. 내 이미지 자체가 일종의 자기 혐오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잘 들여다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 명품으로 자존감을 얻고 있던 '나라는 인간' 자체를 사실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폭로가 아닐까? 내가 나를 바라봐주고 있다고 믿었던 그 '타인의 시선'도 사실은 공허한 '헛것'에 불과했다는 폭로는 아닐까? 사실, 나는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스스로 가치있는 존재라고 믿는 '치장'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 순간'이 아닐까?
만약 내가 내 삶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혐오'하게 될 리는 없다. 가령, 내가 매일 진심으로 도자기를 빚으며 사는 장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 모습을 패러디했다고 해서 자기의 라이프스타일이 혐오스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자연을 사랑해서 등산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산에서의 시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이 패러디 되었다고 해서 내일부터 산에 안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욕망하던 그것이 제3의 시선으로 재현되며 패러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혐오스러워' 진다면, 사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것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 내 것도 아니었고, 내 삶도 아니었으며, 그저 허영에 불과했다는 사실의 폭로 앞에 혐오 말고는 느낄 게 없는 것이다. 반면, 자기 삶을 진정으로 좋아한 사람은 삶이 희화화 되었을 때,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맞아, 그게 내 삶이야, 우리네 삶이지, 나는 이 웃긴 삶을 사랑하고 있어, 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 삶은 터무니 없는 짓을 하며 밤을 새는 청춘의 새벽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땅을 파거나 개미를 쫓아다는 일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인으로 살거나 실개천 곁을 달리는 삶일 수도 있고, 마을에 모여 엉덩이를 덩실대며 춤추는 오후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우리가 삶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재현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재현은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삶에 대한 사랑이나 혐오는 그렇게 폭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