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하루종일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상담한 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잠시 신호에 멈춰 있는데, 커다란 리어카를 끌고 있는 등이 굽은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폐지를 잔뜩 싣고 가고 있었는데, 도보에 멈춰 서서 박스를 주웠다. 그러다가 박스 옆에 있던, 누가 버리고 간 벤티 사이즈 정도 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 내용물을 박스에 쏟아 부었다.
나는 순간 '왜 그러시는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플라스틱 컵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물을 쏟아버린 박스를 자신의 리어카에 실었다.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차를 출발했다. 그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종이의 무게를 늘여서 얼마를 더 받고자 한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순간, 사고가 멈춰버린 듯했다.
그 날 봤던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중, chatGPT에게 보통 500ml 정도의 물을 부어 폐지에 무게를 추가할 경우 얼마를 더 받냐고 물어보았다. chatGTP는 52원 정도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52원의 부도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52원의 부도덕. 이것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비난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기묘한 진퇴양난의 삼도천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많은 편인 나는 어떤 주제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결론을 낼 때까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이 문제를 친한 지인에게 말해보았다. 그는 "별로 안 충격적인데. 단 번에 이해되는데."하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지 않느냐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담배를 피우러 10분 나갔다 오면, 일 안하고 돈 번 것 같아서 기분 좋지 않냐고 했다. 말하자면, 52원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는 돈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의 약간의 쾌감 같은 것에서 얻는 이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분석은 타당했지만, 내 머릿속의 혼란을 해결해주진 못했다. 사실, 나는 그 52원의 부도덕을 저지르게 만들어야만 하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 해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어떤 세상은, 어떤 사회는, 어떤 삶은 52원의 부도덕을 저지르도록 강요하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나는 아마도 그 사람이 평생 놈팽이처럼 살거나 부도덕하게 타인들에게 사기를 치며 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를 거기까지 몰아넣은 건 그의 성실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기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한 시절에는 아이를 먹이며 키우고, 그러나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악조건 안에서 끝없이 일해온 결과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에게 물을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게 물어야 문제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나라 노인 빈곤율과 자살율은 마땅한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불합리하거나 완전히 잘못된 문제일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요령 피우기 보다는 성실히 할 일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기는 커녕 거짓말 하는 건 나쁜 일이라고 가르친다. 악당처럼 살면 안되고 용사처럼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성실하고 선하게 살고자 노력한 용사가 우리 나라에 와서 산다면, 결국에는 이 현실에서 온전한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게 옳은 걸까?
내 안의 이 복잡한 심경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분명한 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이름 없는 희생들을 무덤처럼 깔고 앉아 있다는 점이고, 나도 그 무덤 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나 또한 특별히 면책될 것 없이, 남들보다 정의롭거나 선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삶에서의 의무가 있다면, 그 현실을 마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등을 돌리지 않고, 봐야할 건 명료하게 봐야한다. 거기에는 내 안의 위선이나 오만이 포함된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굳이 이 심경을 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