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내 아이는 나처럼 살게하지 않겠다.' 이 정서야말로 한국을 지배해온 정서가 아닐까 싶다. 이 정서로 한국은 전쟁 후 폐허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건설했지만, 동시에 이 정서가 한국을 정서적 지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내 아이는 나처럼 천대받게 하지 않겠다, 내 아이는 나처럼 가난하게 살게 하지 않겠다, 내 아이는 나처럼 살지 않겠다, 라는 이 강렬한 염원이 '한강의 기적'과 동시에 '인구소멸'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와 관식은 자식에게 "절대로 바다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다른 건 다 될지 몰라도, '바다'는 절대 안된다. 왜냐하면 '바다'야말로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애순의 엄마조차 애순이에게 '해녀'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한다. 애순이도 '내 아이는 해녀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며 시어머니, 시할머니와 등을 돌린다. 여기에 깔린 정서는 '내 삶을 부정'하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렬한 염원이다. 한 맺힌 염원이고, 필사의 절규이며, 사생결단의 욕망이다.
아마도 80년대생인 나의 세대를 비롯하여, 그 앞세대들도 부모로부터 한번쯤은 다 들어본 말이 있을 것이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내 생각에, 전 세계에서 대부분의 부모가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이건 그만큼 황폐했고 가난했고 척박했던 우리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정서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만 삶을 버티고, 살아내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 살아갈 보다 나은 삶의 꿈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부모들이 가졌던 유일한 희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 꿈은 우리 사회를 일으켜세웠고,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도 이뤄냈지만, 동시에 씻을 수 없는 부작용도 낳은 듯하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라는 말 그대로, 청년들은 이 땅에서 결혼하여 아이 낳고 부모처럼 사는 바로 그 삶을 관두었다. 부모처럼 살기 싫어서, 그렇게 희생하면서, 자식에 목을 매는, 자기 삶은 없이 집도 배도 다 털어 자식에게 주는 관식이나 애순이처럼 살기 싫어서, 가족을 꾸린다는 걸 관두었다.
물론, 거기에는 단순히 '싫다' 이상의 어려움도 있다. 세계적으로도 높은 소득 대비 집값, 자산과 소득 격차, 살인적인 사교육 경쟁, 수도권 집중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나 조건들로는 환원할 수 없는 '내면의 지향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 '지향성'은 마치 대를 이어 물려받듯이 이어받은 정서이다. '부모처럼 살지 말 것'이라는 이 강렬한 지향성이 이 한편의 드라마 속에서도 구구절절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희망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막막할 때, 내가 하나 생각하는 건 '닮고 싶은 삶을 살자'라는 것이다. 마냥 엄청나게 돈 벌어서 한강뷰 아파트와 외제차를 자랑하며 값비싼 소비를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아이도 닮고 싶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도, 엄마 아빠처럼 살아." 그러려면 참으로 좋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좋은 꿈을 꾸고, 사랑할 줄 알고, 조금은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면서, 아이에게도 좋은 기억의 삶을 남겨야 할 것이다.
바다는 전쟁처럼, 혹은 IMF처럼, 혹은 가난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애순이와 관식이는 '사랑'하며 산다. 모르면 몰라도, 그 자녀들이 '사랑'만큼은 배웠을 것이다. 애순이도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어."라고 하면서도, 엄마 삶이 나름 사랑으로 "짱짱"했다고, 엄마 삶도 좀 "인정"해달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해야할 건 그것일 수 있다. 삶을 인정하는 것. 그래도 애써 잘 살아냈고, 애써 좋은 삶이었다고 나 스스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모두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데서 이 사회의 꿈이라는 것도 시작될런지 모른다.
* 사진은 드라마 #폭싹속았수다 캡쳐화면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