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엡스타인 논란을 보면, 어마어마한 돈과 권력, 명성 같은 걸 얻어봐야 마지막에는 권태에 못이겨 미성년자들 성폭행이나 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엡스타인은 자신의 사유지인 섬을 '미성년자를 성착취하는 섬'으로 탈바꿈시켰고, 이곳은 전세계 정재계 거물들이 탐욕을 배설하는 폐쇄적인 낙원이 되었다. 최종적인 사실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문건 속에는 전직 대통령, 왕실 인사, 억만장자, 심지어 유명 지식인들의 이름까지 줄줄이 거론된다.
그런 삶에 다다란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얻은 사람들의 권태와 허무에 대해서는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던 진실이 있다. 모든 것을 가졌던 솔로몬은 노년에 이르러 그 유명한 구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허되다."라는 고백을 남겼다. 삶의 정점에 이르러, 얻고 싶은 것을 모두 얻은 것 역시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삶에는 적당한 결핍이 필요하다.
나는 종종 지난 20여년을 돌이켜 보면서, 나의 결핍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아마 결핍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글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결핍 때문에 계속 글을 써나간다는 걸 알고 있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생활이 유지될 만큼의 재력이 내겐 없다. 내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이 글쓰기여서 글을 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은 작품들을 써나간 건, 형제의 빚과 자신의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도 있다.
내가 아는 몇몇 작가들 중엔, 첫 작품이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두어서, 창작 의욕을 잃어버린 경우들이 있다. 이미 돈은 벌 만큼 벌었고, 그 이후엔 돈이 돈을 벌게 되었고, 이후 책을 계속 써나가봐야 처음만큼 반응이 없자 창작 의욕이 크게 꺾여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조차도 배부른 고민이고 행복이겠지만, 나는 나대로 지금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내게는 창작 의욕이 목 마르듯 계속하여 피어오른다. 한 번도 책 한 권으로 수십만 부가 팔리는 '대박'을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나의 바람이 있다면, 너무 일찍 결핍 없는 성공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물론, 너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것도 약간 곤란하다. 맛있는 거 먹고, 여행다닐 수 있고, 노후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성취를 거두면서, 한편에는 결핍을 껴안고 계속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중박' 인생이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날, 수십억을 벌고, 강남에 아파트를 사고,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쓰는 글이 다 위선 같고 고뇌조차 허영처럼 느껴질 것만 같다. 그보다는, 인생 내내 적당한 간절함, 결핍, 절실함이 따라 붙어 있어주면 좋겠다.
그런 적당한 결핍이 있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이나 가족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배우자조차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고, 온갖 친구들도 돈으로 살 수 있고, 세상 모든 것이 내 아래 있는 듯한 입장이 되어버리면, 도대체 무엇이 내게 소중할지 의심스럽다. 나는 내가 선택과 여력의 제한 속에서, 결핍을 끼고, 그래서 더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절실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것조차 너무 큰 욕심은 아니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