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는 나의 언어로 육아를 기록한 일이 아닐까 싶다. 서른 무렵, 육아를 시작하던 내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었다. 세상을 둘러봐도, 당시 분위기로 육아란 것은 몇 년간의 지옥이고, 희생이고, 자아 정체성의 포기이고, 절망과 힘겨움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팔자 좋게 육아의 아름다움이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를 찾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다만, 나는 세상에서 언어를 찾기 보다는, 내게 도래한 그 경험에 관해 온전히 나의 마음으로 대하고 싶었다. 육아가 지옥인지 축복인지, 절망인지 행복인지는 내가 느끼는 것만이 진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게 도래한 육아는, 그 시절의 모든 어려움을 둘째치더라도, 축복에 가까운 놀라움이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고, 처음 함께 걷고, 노을을 마주할 때, 나는 이미 그 시절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인생의 그 어느 시절보다.
요즘에는 육아에 대해 사뭇 달라진 세상의 분위기를 느낀다. 육아가 일종의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덕질'이라며 긍정하는 이야기도 많고, 단순히 희생 같은 걸 넘어 '사치재'라면서 인생의 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많이 본다. 그렇지만 시절이 어떻건, 세상 사람이 무어라 하건, 중요한 건 자신이 느낀 삶을 온전히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은 결국 세상에 없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육아>를 출간하고, 후기로 수백번쯤 들은 말은, 육아 시절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볼 때마다 무척 기쁜 마음이었다. 내가 남긴 이야기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다니, 다행이고 신기하다, 같은 마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아시절 이 책을 만난 게 행운이다, 육아를 대하는 마음이 이책을 읽기 전과 후로 나뉜다, 육아를 대하는 관점을 바꾸어 주었다, 같은 이야기들을 남겨주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참 고맙게도 내가 글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나는 지금도 어쩌면, 거의 매일같이 하나의 작업을 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내가 사는 삶은 가능한 한 온전하게, 정확하게, 진실되게 느끼고 나의 언어로 기록하는 일이다. 사실, 내 마음이나 머릿속도 너무 많은 것들로 오염이 되어 있다. 마땅히 어떤 삶을 살아야하고, 무엇을 얻어야하고, 지향하고 욕망하고 남들 따라 살며 비슷하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매일 바이러스가 침입하듯 내 안으로 세상의 기준들이 쏟아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는 온전히 이 삶을 느끼고 싶다. 내가 느끼는 것만이 진실이다. 그게 어떤 삶이든 말이다.
타인들은 내 삶에 대해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내가 되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볼 때는 최악의 인생처럼 보여도, 그는 가장 투명하고 진실되게 자기 삶을 마주보며, 한 톨 거짓 없이 자기 삶을 긍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동차 브랜드로, 살고 있는 아파트값으로, 그밖의 수많은 것들로 타인들에 대해 판관이 되길 자처하며, 삶의 우열을 나누는 모든 시선들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대신 나는 온전히 나의 마음으로 가장 투명하게 내 삶을 대하며, 내 기준에서 최선의 삶을, 내가 가장 사랑할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에 이르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끝없이 반복되는 애씀이 될 것이다. 나는 명상하듯 내가 느끼는 좋은 삶을 매일같이 느끼고, 명사수처럼 그 방향을 잃지 않으며 매일 한 걸음씩 더 다가가고자 애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진실되게 나의 언어로 써나갈 것이다. '오늘의 나를 쓰는 시간' 안에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 그것이 또한 나는 30대가 그러했듯, 내가 나의 40대를 후회하지 않게 사는 법이라는 걸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