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동기들과의 기묘한 동거: 누나에서 '엄마'가 되기까지
입학 첫날, 강의실 문을 열 때만 해도 나는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학교만 다닐 생각이었다. '이모', '아줌마' 소리만 안 들어도 성공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몸에 밴 ’ 트레이너형 성격’은 숨길 수가 없었다.
선수들과 뒹굴며 지냈던 짬 때문일까. 쭈뼛거리는 동기들이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운 '유소년 선수'들처럼 보였다.
"야, 너 자세가 왜 그래? 허리 펴."
"밥은 먹고 다니냐?"
무심코 툭 던진 한마디에 녀석들의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12살 차이? 그건 숫자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려운 선배가 아니라, 말 잘 통하고 밥 잘 사주는 든든한 '왕누나'가 되어 있었다.
친해진 건 좋았는데, 부작용(?)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동기들이 나를 의지하는 정도가 '동기 사랑'을 넘어섰다.
수강 신청부터 과제 마감일 체크, 심지어 점심 메뉴 결정까지.
"누나, 이거 어떻게 해요?", "누나,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릴 때면 가끔 헷갈린다. 내가 학교에 공부하러 온 건지, 육아를 하러 온 건지.
챙겨줘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내 별명은 자연스럽게 ‘엄마’가 되었다. 미완성인 내 인생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졸지에 스무 살 아들딸 수십 명이 생겨버렸다. 귀찮으면서도, 나를 믿고 따르는 그 눈망울들을 보면 또 지갑을 열고 밥을 사 먹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에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은 있다. 바로 '남자 동기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패턴'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강의실 뒤편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게임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다른 종족'을 보는 것 같다.
"쟤네는 왜 저러는 걸까...?"
여자 동기들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한편으론 그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기도 하다. 내 무릎은 비 오면 쑤시는데, 저 녀석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멀쩡하게 뛰어다니니까.
가끔 그들의 대화 속에 섞인 줄임말을 못 알아들어 "잠깐만,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32살이라는 현실을 자각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동기들과 친해질수록 뼈저리게 느끼는 건 바로 '넘을 수 없는 체력의 벽'이었다. 녀석들은 마치 무한 리필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 같았다.
분명 어제 새벽까지 같이 술잔을 부딪쳤는데,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는 동기들을 보면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셔서 덜 마셔도 좀비처럼 기어가는데, 쟤네 간은 도대체 무슨 소재로 만들어진 걸까?
동기들이 해맑게 물어올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무 살 때는 벼락치기가 통했지만, 서른둘의 밤샘은 자살골이나 다름없다. 밤을 새우면 머리가 멍해져서 아는 문제도 틀리는 게 내 나이다.
나는 전략을 바꿨다. 녀석들이 핫식스를 마시며 밤을 불태울 때, 나는 "얘들아, 누나는 잔다. 내일 보자." 하며 전기장판 위로 도망쳤다. 잠을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이 "피시방 가자!", "코노 가자!"를 외칠 때, 나는 조용히 집에 가서 낮잠을 자야 했다. 한 번 외출하면 반드시 '휴식 모드'로 들어가야만 다음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 저질 체력.
강의실 뒤편에서 떠드는 녀석들의 에너지가 부러워서 쳐다보면, 내 무릎에선 "이제 좀 눕죠?"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물리치료가 필요한 환자 상태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들이 쭈뼛거리며 내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올리브영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 안에는 핸드크림이 들어 있었다.
"누나, 군대 가기 전에 꼭 챙겨주고 싶었어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철없는 줄만 알았던 녀석들이, 나를 위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거칠어진 내 손을 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내 마음을 알아준 걸까.
핸드크림 뚜껑을 열자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나는 미완성의 32살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