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되지 않아도 충분한 오늘
가끔 서늘한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온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미완성'이다.
특히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릴 때면, 가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막막해지곤 한다.
서른둘. 남들은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전세금을 모으고 청첩장을 돌릴 나이지만, 내 통장 잔고는 한없이 가볍다. 프리랜서 시절 모아둔 돈은 진작에 바닥났고, 당장 내년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학생 신분. '내가 너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이 나이에 모아둔 돈도 없이 다시 시작하는 게 맞았을까?' 현실적인 무게감이 한밤중 불쑥불쑥 나를 덮쳐 잠 못 들게 한다.
이 숨 막히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일을 묵묵히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미래를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고 해서 통장 잔고가 늘어나진 않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오늘 하루'뿐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해질 때마다 헤드셋을 쓰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노래를 크게 틀고 1시간 내내 운동장을 걷고 나서 샤워를 한다. 샤워 후엔 해부학 용어를 하나 더 외우고, 내일 있을 수업을 준비하며, 주어진 하루하루에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
당장 손에 쥐어지는 돈은 없지만, 내가 채워가고 있는 이 지식과 결과가 결국 내 미래를 가장 확실하게 구원해 줄 단단한 동아줄임을 믿기 때문이다.
물리치료를 배우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망가진 관절과 근육을 재활하는 과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통증을 견뎌야 하고, 지루할 만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며, 무엇보다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내 인생도 지금 긴 재활 치료를 받는 중이다. 서른둘에 다시 1학년이 된 것은, 크게 돌고 있던 내 삶의 궤도를 교정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치료법이었다. 때로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씁쓸하기도 하고, 외워지지 않는 전공 서적을 보며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도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떡하지?"라며 망설이고 있는가?
감히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지나온 시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내가 운동장에서 흘렸던 땀방울이 물리치료학의 깊은 이해로 돌아왔듯, 당신이 방황하며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 역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장 통장이 비어있고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아 숨이 막힌다면, 그저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해보자. 불안을 이기는 가장 센 무기는 꾸준함이다.
어느새 일 년이 저물었다. 올해도 나는 무거운 전공 서적이 든 백팩을 메고, 조금은 삐걱거리는 무릎을 달래며 강의실로 향할 것이다. 나를 ‘이모’가 아닌 ‘언니’라 부르는 이십 대 초반 동기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남자친구와 소박한 밥 한 끼를 나누며, 그렇게 나의 미완성된 하루를 묵묵히 채워가겠지.
아직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불안함 속에서도 기꺼이 내일의 등교를 준비하는 이 단단한 내가 나는 꽤 마음에 든다.
나는 이제 서른셋, 물리치료학과 2학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