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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예 Feb 10. 2021

욕조에 나를 가득 채우고

일본 히로시마 가정집에서의 목욕

 연수는 벌써 3주차에 접어들었지만, 홈스테이를 시작한 지는 이틀 밖에 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나갈 준비를 하려고 눈을 떴는데, 나와 같은 집에서 머무는 언니 J가 옆자리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방이 너무 추워서 그 전날 히터를 밤새도록 틀어놓은 데다가 빡빡한 연수 일정 때문에 피로가 쌓여서 그랬을까. 파리해진 안색으로 코를 훌쩍이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감기약이라도 좀 줄까하고 묻자 언니는 목소리도 못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언니는 이날 일정을 포기하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이날 나는 하루종일 히로시마 원폭 기념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안내사 선생님들의 일본어를 알아듣다가 겨우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하도 많이 걸어다녔더니 발바닥도 아프고, 일본어를 짜내느라 머리를 굴렸더니 머리도 복잡하고, 몸 이곳저곳에서 피곤함이 몰려왔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계단을 올라 2층 방 문을 열었더니, 언니가 아침보다는 조금 개운해진 표정으로 날 맞아주었다. 저녁을 먹으러 언니랑 같이 1층 거실로 내려가자, 이무라 씨는 오늘 J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봐서 걱정했었다면서 안부를 챙겼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아 국그릇을 손에 들고 밥을 드시다가 문득 우릴 쳐다보시더니, 오늘 둘 다 피곤해보이는데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푹 담그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겉으로는 괜찮아요하고 점잖은 대답을 내놓았지만, 속으로는 네제발들어가게해주세요저사실어제부터너무너무들어가보고싶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방방 뛰고 있었다. 이런 내 외침이 이무라 씨의 마음에 닿기라도 했는지, 이무라 씨는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면서 욕조에 물을 다 받으면 부르겠다고 하셨다. 우린 손님으로 집에 머물고 있으니까 제일 먼저 욕조에 들어가도 된다는 말과 함께. 언니와 내가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자, 이무라 씨는 푸근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셨다.


 일본식 욕조. 영화나 만화 속에서만 봤던 걸 내가 직접 써볼 수 있다니. 이무라 씨의 부름이 들리자마자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욕실로 향했다. 세탁기가 있는 곳에서 옷을 벗어두고 안쪽에 있는 문을 열었더니, 날 반기는 수증기로 안경이 뽀얗게 되었다. 돌 타일이 박힌 바닥에 발을 내딛자 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위쪽 공기는 훈훈한데 바닥은 무슨 얼음판처럼 으스스했다. 한기로부터 발바닥을 구하기 위해 나는 얼른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친 뒤, 욕조에 가득 담긴 물 속으로 발을 넣었다. 뜨끈한 기운이 발끝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자 목 깊은 곳에서 아저씨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직 무릎 정도까지 밖에 안 들어갔는데도 벌써 온몸이 데워지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뻣뻣하게 버티고 서서 다리에만 물을 끼얹다가(물이 좀 뜨겁기도 했지만 내가 씻고 난 뒤에 다른 가족들도 여기에서 목욕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묘해져서 그랬다) 이내 바닥에 앉아서 어깨까지 모두 물에 담가보았다.


몸 전체를 담가도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의 깊이,

손 끝에서 발 끝까지 쭉 펴도 충분한 너비,

저절로 데워져서 식지 않는 물까지.

완벽했다.


 따뜻한 기운이 쉴 틈 없이 살갗으로 전해졌다. 정말 내장 깊숙한 곳까지 닿을 것만 같은 진한 온기였다. 머리 끝까지 욕조에 담그자 머리 위로 노란 욕실 불빛이 일렁였다. 이대로 욕실 바닥에 천천히 가라앉아 물속에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 삶긴 국수 가락처럼 몸과 마음이 흐느적거렸다. 물에서 다시 얼굴을 내밀고 김밥 마는 발처럼 생긴 뚜껑을 욕조 위에 덮었다. 두 팔을 걸치고 물 속에 몸을 밀어넣은 채 가만히 욕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풀어지고 피로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일본인이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곳은 여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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