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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예 Jan 26. 2021

빠삭한 치킨카츠에 맥주

일본 히로시마 연수

오늘은 내가 치킨카츠 요리사

 홈스테이 이틀째. 이날도 어김없이 요리 시간이 찾아왔다. 오늘 저녁은 치킨카츠!     

 나, 언니 J, 아미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옹기종기 모여 각자 할 일을 정했다. 먼저 내가 커다란 닭가슴살 덩어리를 칼로 얇게 썰고, 아미가 여기에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를 입혔다. 마지막으로 J 언니가 새 옷을 입은 고기를 튀겨내면 완성이었다.





 처음 몇 개를 튀길 때까진 요리 시간이 즐거웠다. 튀김은 집에서 직접 만들 기회가 적은 요리였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처음 자취라는 걸 해보고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분에 취해있었을 때도 튀김 요리는 귀찮아서 엄두도 못 냈다. 썰어둔 고기와 각종 가루를 담은 그릇들은 식사가 끝나고 나면 결국 어마어마한 설거짓거리가 된다. 그리고 온 주방과 손에 튀는 뜨거운 기름, 옷에 베는 냄새까지. 튀김 요리를 한다는 건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집에선 못 해봤던 걸 직접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반복하는 건 지겨웠다. 1시간이 다 되도록 요리를 했는데 재료는 바닥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무라 씨 가족 5명과 J, 나, 그리고 오늘의 특별 손님인 이무라 씨의 어머님과 할머님까지, 총 9명의 배를 채울 고깃덩어리는 썰어도 썰어도 양이 줄지 않았다. 아미는 지겨워서 이미 J 언니와 역할을 바꾸고 있었고, J 언니는 기름 냄비의 열기 때문에 발그레해진 얼굴을 식히면서 고기에 빵가루를 묻혔다. 모두의 저녁 식사를 위한 요리가 아니라 치킨카츠 공장에서 식품 제조 노동을 하는 느낌이었다. 썰고, 묻히고, 튀기고, 또 썰고, 또 묻히고, 또 튀기고. 계속 생각 없이 칼질을 하다보니 고기 모양은 어느새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방금 썰었던 고기는 내가 봐도 웃기는 모양이었다. 초밥 위에 얹는 회처럼 얇고 작은 살점이었다. 옆에 서 있는 아미에게 이걸 보여주면서 치킨 사시미 좀 보라고 했더니, 아미가 피식 웃었다. 아직 썰어야 할 고기는 많이 남았지만, 아미를 웃겼다는 뿌듯함을 안고 다시 칼을 바로 잡았다.





만난 지 10분도 안 된 분께 드리는 식사

 30분쯤 더 지났을까. 어느새 쟁반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치킨카츠가 가득 담겼다. 너무 많이 익어서 색이 좀 진해진 것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와서 놀랐다. 산더미처럼 쌓인 치킨카츠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편안하고 풍족해지는 것 같았다. 남은 요리를 마저 마무리할 의지가 생겼다.     


 잠시 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바로 앞집에 살고 계신 특별 손님이 찾아오셨다. 이무라 씨의 어머님과 할머님은 일주일에 한 번은 이무라 씨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하셨다. 우리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두 분은 식사를, 우리는 요리를 마저 마무리했다. 두 어르신의 입에 우리가 만든 음식이 들어가자 기분이 묘해졌다. 한국에서도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요리를 해줄 수 없는데, 만난 지 10분도 안 된 사람에게 직접 요리를 해주다니.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했다. 두 분은 모두 그릇을 싹 비우고 가셨다. 남은 일본에서의 생활이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모든 튀김은 맥주로 통한다

 우린 두 분이 가시고 난 뒤에야 가스렌지의 불을 끄고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식탁 가운데에 산더미처럼 쌓인 치킨카츠를 두고, 각자의 접시에 치킨카츠를 덜어왔다. 양배추, 옥수수, 토마토를 곁들이면 완성. 치킨카츠 위에 취향에 맞는 소스를 뿌리면 진짜 완성. 갖가지 색이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이제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의 팔레트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하려고 했을 때, 이무라 씨도 입을 여셨다.


 둘 다 맥주 좋아하니?” 형식적인 사양 뒤에 놓인 맥주캔과 유리잔. 나는 맥주 그 자체도 좋아하지만, 캔에 달린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줄 때 생기는 청량한 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맥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피로로 딱딱해졌던 어깨가 말랑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뒤이어 입안을 채우는 샐러드와 치킨카츠. 식탁에 놓인 치킨카츠가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 먹을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솟구치는 맛이었다. 오늘 저녁의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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