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며칠 전 내린 눈이 세상에 남아 있던 옅은 훈기마저 모두 앗아가 버리고 나서야 겨울이 얼마나 시린 계절인지를 기억해 낸다. 춥다. 이런 날엔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지.
나탈리 포트만에 대해 백은선 작가가 쓴 짧은 글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나탈리 포트만이 나왔던 영화들을 하나씩 상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클로저」를 다시 찾아보았다. 왜냐하면 분명 영화를 봤음에도 몇 개의 장면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2005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했고, 난 그때 대학 동기 몇 명과 함께 역사 건물에 있던 영화관을 찾았다. 동기들과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그때 했었던 것 같고, 당시 인물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영화를 다시 본) 지금 한다. 영화는 재밌었다. 휘발된 기억 때문에 마치 처음 본 것처럼 푹 빠져서 봤다.
그러게,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나탈리 포트만이 분한 앨리스(와 제인)가 런던과 뉴욕을 걷는 첫 씬과 마지막 씬에 깔리는 데미언 라이스의 목소리에, 아, 맞다, 이 곡이 이 영화의 OST였지 싶더라. 그래서 영화를 보자마자 앨범을 다시 찾아들었다. 옛 음악은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자극한다. 그 음악을 들었던 때의 장면들을 몽땅 가져와 내 눈 앞에 훌훌 펼쳐놓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난감함과 낭패감. 음악을 들으니 이십 대 초반의 내가, 그래서 서툴고 설익었던 내가, 그래서 모든 걸 망치고 엉망으로 만들었던 내가 떠오른다. 패배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슬픔에 경도되었던 그때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니 가여운 존재였다. 스무 살은 누구나 서툴고 설익으며, 그래서 모든 걸 망치고 엉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친한 스무 살이 있다면 알려주고 싶은데 없네.) 그래서 궁금하다. 삼십 대 중반인 지금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인 것 역시 당연한 건지.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걸 안다. 슬픔이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며, 반복적이고,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안다.
메리 올리버 「긴 호흡」
메리 올리버가 이렇게 쓴 건, 나이가 들어서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느끼기 때문일까.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잘 알지만 차양을 드리우면 결국 그 그림자 속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지만 해결책이 없기에 반복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메리, 그곳은 슬픔이 없겠지요.)
스무 살 무렵 느꼈던 슬픔은 마치 호주머니 속 유리조각 같았다. 타인에게 들키기 싫어 주머니에서 꺼내지는 못하고, 그저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손등이며 손바닥, 손가락을 온통 생채기 냈다. 그 유리조각은 이제 시간에 풍화되어 모래 알갱이가 되었다.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나가며 더 이상 심각한 상처를 입히진 않는다. 하지만 연약한 피부는 모래알에도 베일 수 있으니 이제 그만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추억여행은 짧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