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회식을 할 일이 없었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전염병 때문에 친구들과 밤늦게 술을 마실 일도 없었고. 사실 굳이 그런 시국 때문이 아니더라도 모종의 이유로 다들 술자리를 멀리하는 추세였다. 그쯤 되면 1. 몸 어디가 삐그덕 대거나 2. 책임질 새로운 가족이 생기거나 3. 우르르 몰려다니며 취기에 오르는 게 갑자기 민망해지거나 하니까. 사실 나 역시도 급격히 안 좋아진 육체와 정신 건강으로 인해 금주를 선언했었는데...
그러다가 연말에 어느 회사 회식 자리에 끼게 되었다. 가끔 외주를 받는 회사인데, 이 회사가 이번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고객사로부터 감사의 대접을 받게 된 거다. 그러니까 고객사와 제작사의 주요 실무진과 임원진이 모인 자리에 유일한 외부인으로 참석한 것. 사실 초대를 받긴 했어도 가는 게 맞나 고민이 됐었다. 회의에 한두 번 참여한 거 빼고는 주로 집에서 홀로 작업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유대감이나 성취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참여자를 모두 알지도 못했고. 그래도 거절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 정말 오랜만에 밤의 압구정으로 향했는데.
처음엔 쭈뼛대긴 했지만 가게의 그윽한 분위기와 제법 살가운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나도 잘 녹아들 수 있었다. 풀어진 공기에 테이블 위로 격의 없는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게 오갈 무렵, 누가 내게 물었다. "개인적인 글도 쓰시죠?"
뭐, 가끔 받는 질문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에는 좀 아픈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쓰고 싶은, 써야만 하는 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는 틈이 없었고, 그런 틈을 사실 내지도 않았으며, 겨우 틈을 냈다고 해도 몇 줄 채워놓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은 인정했다. 쓰고 싶은 글도, 써야만 하는 글도 없었다. 나는 창작자가 아니라 향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니, 결심이 아니라 인정이지. 그래서 이번의 질문에도 "아뇨. 개인적인 글이라고는 일기만 써요." 하며 웃어넘겼다.
개인적이지 않은 글을 써서 먹고살고 있는 나에게 돌아오는 피드백은 주로 '메시지를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서 제법 세련되고 참신한지'에 대한 판단이 대부분이다. 15년 가까이 훈련한 탓에 대체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합하는 글을 써내고는 있는데, 그러다 보니 나 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아주 개인적인 글인 일기에 마저도 그 습성이 배었다. MBTI -NF-가 아닌 -ST-의 일기, 나 역시 재미없어서 들춰 보지 않는 일기, 읽기의 용도를 상실한 오직 쓰기의 일기.
밀실이 아닌 광장에 풀어놓은 개인적인 글은 어떨까. 브런치의 알람을 내도록 무시하다가 오늘 오랜만에 들어와 봤다. 분명하고 설득력 있으면서 세련되고 참신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아도 되는 글을 쓰려던 몇 년 전의 노력들이 아직 남아 있는 이곳. 처음에는 업로드했던 글들을 싹 지울 생각이었는데, 지난 흔적을 그저 흐린 눈으로 못 본 척 채 글쓰기 아이콘을 눌렀다. 몰라. 뭘 다시 열심히 써보겠다는 건 아니고, 오늘은 1월 1일이 아니니까. 계획을 세울 필요도, 세운 계획을 실천할 필요도, 계획을 꾸준히 지킬 필요도 없는 31일이니까.
사실 2026년의 계획이랄까 목표랄까 소망이 있다면 먹고사니즘을 위한 글을 더 많이 쓰는 거다. 올해는 작년, 재작년과 단순 비교해도 일이 없었다. 곳간 걱정이 최고치에 달했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이 없는데 따박따박 나가야 하는 지출은 많은 내 입장에서는 스릴러 같은 한 해였다. 시간과 돈은 반비례해서 한가로이 넘치는 시간은 가난이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고, 일하는 시간보다 일하지 않는 시간의 소비가 더 클 수밖에 없어서 별 거 없이 흘려보내는 일상 한편엔 늘 죄책감과 불안감이 존재했다. 시간을 내 맘대로 온전히 보낸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에게 시간이란 시간 그 자체가 결핍되어 있거나 혹은 다른 게 결핍되어 있는 상태인데. 수명 연장으로 100세 넘게 산다 해도 죽기 직전까지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2026년의 스케쥴러는 이미 구매해 두었고, 특별한 계획은 없어도 올해보다 조금 더 나아질 내년을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돈 되는 글도 많이 쓰고, 돈 안 되는 글도 좀 써보기로 하자. 물 마시고 몸 움직이고 이런저런 할 수 있는 걸 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