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짤막하게

1일

by 지예강

2025년 세밑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천선란 작가의 『노랜드』였다. 한참 후에야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이 세 번째 챕터가 아니라 세 번째 소설이라는 걸 깨달았다. 책에 실린 모든 소설의 제목을 노랜드」로 바꿔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노랜드」라는 제목의 소설은 없었다. 흔히 그렇듯 표제작에서 제목을 따와서 소설집의 이름을 붙인 경우가 아닌 거다.


아무튼 연말에 읽기에 매우 적당했다고 본다. 왜냐면 새해에 읽기에는 꽤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 우리가 곧 경험할 법한 세계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아프게 견디는 존재(전형적 인간 또는 신인류 또는 외계인 또는)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한 해가 끝장나기 전에 무조건 이 책을 끝장 내야 했다. 액운을 쫓기 위해 단단한 부럼을 씹는 심정으로.


하지만 그 애가 원했던 것은 출구였다. 제대로 된 착륙이었다. 함께 태어났는데 왜 그 애는 이 세계와 화합을 이루지 못하였는가. 죽고 싶다는 마음이 왜 살고 싶지 않다는 문장과 결합되지 않고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했는가.

천선란, 「두 세계」, 『노랜드』


[죽고 싶다는 마음 =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 진짜 삶을 살자는 마음]의 저 소설 속 인물과는 다르게 나는 죽고 싶은 적이 없었고 뭐,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2025년을 그다지 절실하게 보내지 않았는데,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가짜 삶은 아니잖는가. 어떤 면에선 조금 나빠졌지만, 또 다른 부분에선 그만큼 좋아졌다. 향상심은 없었어도 항상심은 지켰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새해 첫 책은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이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이게 새해의 시작과 함께 하기 적당한 지는 아직 모르겠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는 달리 이야기는 제법 유쾌한 무드다. 물론 이것도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데 아직 10분의 1 밖에 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제작(이 책은 표제작이 있다.) 「청소부 매뉴얼」에는 청소부를 위한 조언이 나온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청소부만을 위한 조언이 아니다. 600페이지를 다 읽다 보면 날 위한 조언 한 두 개쯤은 구할 수 있겠지.


(청소부를 위한 조언: 당신이 일을 철저히 한다는 걸 그들이 알게 할 것. 일을 시작하는 첫날, 청소한 뒤 가구를 제자리에 놓을 때 잘못 놓을 것……. 5에서 10인치 정도 벗어난 곳에 놓거나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을 것. 먼지를 털 때는 샴고양이 도자기 인형들의 위치를 바꾸어놓고, 크림 그릇은 설탕 왼쪽에 놓을 것. 칫솔 놓아둔 위치도 모두 바꿀 것.)

루시아 벌린, 「청소부 매뉴얼」, 『청소부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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