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형의 여행자에게 요즘의 여행이란 실로 재미가 없다. 떠나기 전에 이미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뭘 먹어야 하는지, 어떤 즐거움을 놓치면 안 되는지 그 여행의 A to Z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고화질 사진과 영상, 수많은 임상 데이터로 축적된 별점과 평점, 꼭 챙겨야 하는 꿀팁과 노하우. 그 모든 정보는 대부분 현지 상황을 즉각적으로 반영,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정확도 면에서 오차가 거의 없다. 재정적, 시간적, 감정적으로 손해보지 않으려면 이렇게 친절한 가이던스를 놓쳐선 안된다.
게다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다. 가본 적도 없는 곳에 대해 내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밥친구로, 때로는 킬링타임용으로 아무 생각 없이 틀어뒀던 TV나 유튜브, 넷플릭스의 콘텐츠로 의도치 않은 학습을 해 온 거다. 여행은 더 이상 특별하고 설레는 일 아니라, 남들 다 해 본 경험을 나도 해보고야 말겠다는 fomo의 발현이 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행 후일담을 친구나 지인들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어딘가를 다녀왔다고 하면 '그 맛집', '그 카페', '그 핫플레이스' 가봤냐는 질문이 먼저 나오게 된 건, 안 가봤다는 대답에는 뭔가 중대한 걸 놓친 냥 대신 안타까워하게 된 건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여행을 간 건 약 3년 전이다. 목적지는 호주 시드니였고 15년 만의 방문이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시드니는 변한 게 별로 없었다. 변한 건 내 사정이었다. 15년 전의 나는 1년 간의 체류를 위해 한 손으로는 사계절 옷이 담긴 이민가방 크기의 캐리어를 끌었고, 다른 손에는 론리플래닛이 들려 있었다. 론리플래닛. 벽돌 두께의 여행책자. 그때는 이국에서의 생활과 여행이 그 책 한 권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늘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마치 백과사전이나 전화번호부처럼 글자로만 빼곡히 채워진, 그러나 단 한 글자도 제 몫을 하지 않는 것이 없는, 대체로 불친절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숨통의 틔워주는 그런 존재. (비유를 백과사전과 전화번호부로 하다니. 이들마저도 지금은 사라졌거나 외면받는 종류가 아닌가.)
호주를 한 바퀴 돌면서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페이지는 뜯어 내기도 했고, 어떤 페이지는 너무 들춰본 탓에 너덜너덜거리다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처음의 물성과 무게를 잃어버렸지만 1년간 가장 충실한 여행 동반자가 되어 주었기에, 그다음 여행에서도 난 고민 없이 론리플래닛을 선택했다. 몇 개의 나라, 몇 개의 도시를 론리플래닛에 의지했더라? 더 훌륭한 사진과 더 다정한 문체가 실린 여러 여행책자들이 출간되었지만 처음의 순정을 지키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물론 지금의 여행엔 론리플래닛이 필요 없다. 3년 전의 시드니 여행도 그랬다. 이전의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새롭게 알아야 하거나 쓸만한 정보들은 인터넷으로 취해서 노션에 착착 정리해 뒀다. 사실 미리 공부하지 않아도 구글맵만 있으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두꺼운 여행책자를 황급히 뒤질 필요도 없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이불만 한 크기의 지도를 펼쳐 동서남북을 가늠할 필요도 없는 거다.
관광객이 아닌 척할 수는 있지만, 대신 현지인처럼 모든 움직임이 매끄러워야 할 의무가 있다. 이미 사전에 계획된 동선, 우연 없는 발견, 눈치챈 감동. 그래서 요즘의 여행은 재미가 없다. 아무 준비 없이 비행기표만 끊어서 훌쩍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글쎄, 또 그럴 용기가 아직은 없네.
사실 여행뿐만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묽고 밍밍하다. 원인이 나인지 세상인지 몰라서 누구 탓도 못한 채 비슷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새해가 뜬 지 3일째인데 벌써 뻔하고 지루하네. 그래서 안심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내 마음.
참, 알라딘과 예스 24에 '론리플래닛'을 검색해 봤다. 국내는 2012~2014년 즈음 나온 판본이 가장 최신이고, 그마저도 절판이나 품절이다. 해외 어딘가에서는 최근까지 출간된 모양인데. 까막눈 상태로 낯선 도시에 도착, 일단 가까운 공항 내 서점으로 달려가 그 나라의 언어로 된 론리플래닛을 집어드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 여행, 제법 재밌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