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짤막하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기분이 나빴나

by 지예강

매번 헷갈린다. 벼락치기하듯 공부를 해도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긴가민가하다. 예를 들면 갈대와 억새, 벚꽃과 매화, 알파카와 라마, 수달과 해달, 그리고 … 광어와 우럭? 몰라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어서 대충 부른다. 갈대를 갈대라 부르는데 억새도 갈대라고 부른다. 벚꽃도 벚꽃, 매화도 벚꽃. 알파카는 알파카, 라마도 알파카. 수달과 해달은 그냥 물개라 퉁치고, 광어와 우럭은 그냥 모둠회다. 근데 뭐,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날이 좋으면 탄천을 한 시간쯤 걷는다. 탄천에 서식하는 수많은 동식물들은 저마다의 이름을 갖겠지만, 내가 제대로 부를 수 있는 건 몇 없다. 인상 깊은 무언가를 발견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냥 '예쁜 꽃이다!', '이상한 벌레다!', '큰 새다!' 이러고 마는 거다. 이름을 모르니 수식할 수 있는 형용사도 가난하다. 그래서 그냥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을 뿐이다. 때론 산책하시던 어르신이 걸음을 늦추며 '흰머리검은날개붉은턱짧지만튼튼한다리도요새네. 매년 이맘때쯤 한국에 오는 겨울철새인데 주로 긴꼬리왕더듬이제비꼬리노랗고호랑나비의 유충을 먹이로 삼거든. 저 놈은 평균에 비해 뿔이 작고 이빨이 큰 편이네." 하며 짐짓 혼잣말인 양 소양을 뽐내시는 경우가 있다. 그럼 난 "우와!" 하며 더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온몸이 하얗고 목이 늘씬하고 날갯짓이 우아한 새가 있다. 가끔 보는 종이었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건 지난가을부터. 탄천 곳곳에는 유속이나 수위를 조절할 목적으로 자연석을 가져다 보를 만들어 둔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걷고 달리고 운동하는 불특정다수 주민들에 섞여 나만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처럼 그를 만났다. 돌보 위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주변의 부산스러움에도 아랑곳 않는, 영장류의 삼라만상 속에서 자신만의 우주를 고집하는, 힘껏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 사색하는, 던져진 현존재. 뭐지, 저 멋진 녀석은. 그리고 며칠 뒤 거짓말처럼 같은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난 그에게 '두룸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내가 아는 흰 새라고는 두루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용모는 겸재 정선 같은 옛 화가들의 산수화 속에 있을 법하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두룸희라고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특별한 두루미가 되었다.

두룸희를 오후 네 시에 만날 수 있다면 나는 현관문을 나서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우연히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처럼 두룸희를 만날 때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두룸희는 늘 있던 그 자리에 혼자 있기도, 강바닥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도, 물살이 잔잔한 곳에서 가족모임을 하기도, 나뭇가지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때론 청둥오리 무리 속에 어색하게 섞여 있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냈다. 내 첫 새 친구 두룸희야. 인생샷 찍어 줄게.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게 된 건,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며 피부에 닿는 공기가 부쩍 서늘해진 무렵이었다. 평소보다 좀 더 멀리 산책을 나간 날, 낯선 장소에서 두룸희가 아닌 흰 새를 보았다. 멋 부린 것처럼 정수리에 검은 무늬가 있었다. 왠지 더 두루미 같은 생김새였다. 그럼 두룸희는 두루미가 아니야? 생각해 보니 두루미는 학인데, 학은 좀 더 신비롭게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십장생이잖아. 천연기념물이잖아. 그렇게 머릿속에서 두루미 세계관이 거꾸로 뒤집혔다. 걸음을 멈추고 부랴부랴 구글링 하고 챗GPT에 물어봤다. 그러니까 두룸희라고 내 마음대로 부른, 온몸이 새하얀 새는 백로였다. 그리고 그날 맞닥뜨린 검은 무늬 머리의 새는 왜가리였다. 학, 그러니까 두루미는 얼굴에 빨간 점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백로에도 쇠백로, 중백로, 대백로 등이 있고, 그 외에 또 비슷하게 황새, 고니 등이 있으며…, 저마다 크기도, 얼굴과 목과 날개의 무늬도, 부리와 다리의 색도, 도래 시기와 습성도 다르고…, 블라블라. 이러쿵저러쿵. 분명히 다 개성이 있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다 두루미라고 불러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는 아니겠지. 일단 두룸희 본인은 알 테니까. 저 인간은 뭐길래 날 제멋대로 부르나. 기분이 나빴겠지? 나빴을 거다. 아니 분명 나빴다. 왜냐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작 나도 이름이 잘못 불린 경험이 있었고 몹시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는 분. 반복된 실수, 그 속에서 난 의도를 읽었다. 아, 일부러 그러시는구나. 일찍 죽은 남편, 그 남편의 전처, 그 전처의 아들. 그들에게 향한 날 선 감정이 치졸하게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손주에게 고스란히 향했는데, 손주의 이름을 조금씩 다르게, 그러니까 틀리게 부름으로써 남 모를 쾌감을 느꼈던 걸까. 이름이 잘못 불리는 것, 존재를 거부당하는 것. 이유 없이 미움받는 일에 어린아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난 세상의 모든 할머니가 동화 속에 나오는 표독한 마녀 같은 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와의 어린 시절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법을 모른다.


너무 나갔네. 백로를 두루미로 착각한 건 그냥 무지의 발로다. 그리고 난 두루미라 부르지 않았다. '두룸희'라고 불렀지. 강아지 이름이 냥냥이일 수도, 고양이 이름이 댕댕이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누가 뭐래도 넌 영원한 나만의 두룸희야!'라고 당당히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로 그를 우연히 만날 때면 내 맘 같지 않게 '두룸…아니 백로다!'라며 자기 검열을 하곤 했다. 그리고 탄천에 백로의 모습이 드물어지기 시작하면서 새 친구에 대한 관심 역시 조금씩 사그라들고 말았다.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철새인가? (잠깐 찾아보니 여름 철새지만 텃새화되어 겨울철에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론리플래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