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월레스라는 남자가 있다. 엉뚱한 아이디어와 엉성한 손재주를 가진 프로덕트 매니저 겸 디자이너 겸 엔지니어다. 끊임없이 제품을 만들어 내는 왕성한 발명가이자 본인의 제품을 누구보다 애용하는 충성스러운 고객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일을 몹시 사랑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업가 마인드를 가지진 못했다. 그가 일론 머스크처럼 유명해질 수 없는 이유다.
사실 그는 생활력도 부족하다.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건 그의 곁에 그로밋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밋은 그의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그리고 개인비서, 집사, 매니저이기도 하다. 피고용인의 입장으로 보면 월레스 뒤치다꺼리가 주요 업무인 데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의 강도가 꽤 높은 편이다. 그래도 잘 적응만 한다면(그리고 충분한 연봉을 기재한 근로계약서에 서명이 되어 있다면) 근로환경이나 복지가 최악은 아니다. 취업난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죽을 때까지 고용이 약속되어 있고, 최악의 부동산 가격과 장바구니 물가에도 단독 주택에서의 편안한 잠자리와 양질의 식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제공된다. 고용인의 정원을 개인적인 취향으로 꾸밀 수 있는 일의 자율성과 함께,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고전문학을 탐독할 수 있는 밤의 시간도 보장된다. 즉 워라밸이 있다. 또 고용인의 무한한 신뢰는 그로밋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는 실로 만족하는 쪽이다.
하지만 평화롭던 그의 삶에 고용 안정성과 일상 항상성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위기가 찾아온다. 월레스가 마침내 피지컬 AI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 '노봇'. 사실 ChatGPT에 갖다 대기 민망할 만큼 상황 이해와 판단, 명령 이행의 수준이 단순하다. 혼잣말도 하고 노래도 부르지만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기는 어렵다. 그리고 휴머노이드라고 하기엔… 유럽의 난쟁이 요정을 닮았다. 그러나 노봇의 강점은 말 그대로 피지컬이다. 그로밋의 정원일을 대신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손쉽게 옮기는 데에도, 위험한 도구를 섬세하게 다루는 데에도 능숙하다. 힘도 좋고 속도도 빠르고 실수도 없어서 일의 능률을 극대화하는 데 이만한 녀석이 없다. 피고용인의 과중한 업무를 덜어주겠다는 고용인의 배려로 탄생한 노봇은 오히려 피고용인의 자리를 위협하며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조직 내에서 그리고 고용 시장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면 노봇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만의 차별성을 어필해야 하는데, 고인물 그로밋에겐 쉽지 않은 퀘스트다. 자본주의시대, 피지컬 A.I. 이상의 생산성을 내기란 불가능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12월 31일 23시, 새해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 MBC 가요대제전을 보다가 꺼 버리고 넷플릭스를 켰다. 그리고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를 봤다. 2025년 최고의 선택이었다. 액션, 공포, 코미디, 휴먼드라마가 다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 치고는 본격적으로 공포스러웠다. 닭벼슬을 한 악당 펭귄의 해킹으로 잘못된 프롬프트가 입력되는 바람에 제대로 흑화한 노봇. 마치 슬래셔 무비의 연쇄살인마처럼 섬뜩하고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그에게서 처키의 향기를 진하게 느꼈다. <사탄의 인형>, 내 유년 시절 최고의 영화였는데. (어, 그런데 등급이 청소년 관람불가네.)
사실 진짜 공포는 따로 있다. 아는 단어 몇 개를 이리저리 조합해 만들어 낸 얼마간의 문장들로 꾸역꾸역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LLM이란 용어의 등장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생성형 AI조차 이미 낡은 키워드고 2026년의 트렌드는 '피지컬 AI'란다. 이제 뇌로 할 수 있는 일뿐만 아니라, 관절과 근육으로 할 수 있는 일도 AI에게 내줘야 할 판이다. 세상에, AI 앞에 Physical이 붙다니.
괜히 AI와 관련된 콘텐츠를 찾아보고, 커뮤니티 반응을 조심스레 살핀다. 이게 나 혼자만 겪는 개인사적 불행이 아니라 시대의 고민이자 공통의 혼란이라는 데에서 내심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은 결국 하나다. 적일 때는 무섭지만 내 편일 땐 세상 든든하다는 것. 흥선대원군을 특별히 존경하는 게 아니라면 이 흐름에 빨리 적응하는 게 최선이다. 죽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천지개벽할 일이 수백 번은 더 일어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