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겨울이 와 있었다. 땅거미 내릴 무렵 천변 벤치에 앉아 성급하게 넘어가는 볕의 끝을 잡고 만족스럽지 못한 해바라기를 했다. 언제 이렇게 낮이 짧아졌나, 언제 이렇게 공기가 서늘해졌나. 하늘과 이파리와 물빛은 짙고 그걸 바라보는 내 두 눈은 시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1월이다. 고장 난 산소통을 매고 가라앉은 잠수부의 2019년은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뻔한 상태로 바닥을 찍었다가, 그래도 버티는 힘으로 발구름을 한 2020년은 제법 회복 추세였다. 2021년은 수면 위로 올라가 크게 숨 한 번 쉴 수 있으려나. 천변의 공기는 청정했고, 들이마시는 순간 폐부에 닿는 게 곧장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천변 억새의 흰 빛에 지난 2월 순천에서의 기억이 소환됐다. 다시 가고 싶었다. 가자. 그러나 그전에, 손발이 곱기 전에, 내가 두고 온 훈기가 남아 있는 집으로 먼저.
집에 돌아와 오래된 원두로 커피를 내리고 별난 음색의 쓸쓸한 노래들을 찾아 들었다. 한동안 모든 문장이 시시하고 모든 행간이 부질없어서 읽지 않았는데, 오늘은 괜히 온라인 서점과 전자도서관을 기웃거려봤다. 그러고 보니 종이책 만져본지도 오래되었다. 집 앞이 서점인데, 처음엔 그게 큰 행복이었는데, 그 마음이 무색하게도 너무 발길이 뜸했네.
위험한 무언가가 쫓아오면 전력으로 달아나거나 맞서 싸워야 하는데, 잘 달아날 수 있을지 잘 싸울 수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다가 골든 타임을 다 써버렸다. 그리고는 에라, 모르겠다 그냥 까무룩 잠으로. 점점 자주, 점점 오래 잠으로. 그렇게 한 계절을 잠에게 던졌으니, 이제는 기지개 켜고 일어나야지. 남들 동면할 때 겨울 눈밭을 헤치며 도토리를 줍더라도 이 계절은 깨어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