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우울한 나의 고찰
"사랑해서 결혼하는데, 결혼하면 왜 사랑을 안 하는지..."
며칠 전 최고 시청률을 찍고 꽉 막힌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대사다.
수없이 많은 명대사 중, 이 한마디가 나에겐 가장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나 또한 사랑해서 결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사랑이었다.
첫 만남 당시 나의 눈에 그는 김수현 판박이에 젠틀하고 스마트한 엘리트였다.
아무리 바빠도 서로를 위한 시간은 제한이 없었고,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꿈을 꿨다.
각자의 이유로 상처가 남은 어린 시절을 보낸 그와 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지키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래서 연애 1년 만인 2017년 4월 1일 만우절, 우린 거짓말처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준비기간부터 순탄치 않았기에, 달달해야 했던 신혼부터 나는 우울증이라는 깊은 골에 빠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했다. 그런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어느새 뜨거운 애정보다 막대한 책임감이 자리했다.
결혼 8년 차에 접어든 지금, 우린 서로에게 꾸밈이 없다 못해 구멍 난 티셔츠가 유니폼이 되었다. 코골이 bgm이 익숙해질 무렵, 그렇게 우리는... 마주 보는 시간보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은 흔한 K-부부가 된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산책할 때 손을 잡는 것이 불편할 때.
목적 없는 통화가 어색할 때.
외식할 때 서로의 눈 대신 아기만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실패했다고, 결혼 생활이 망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이 부정적 견해를 나의 우울증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우울증을 생기게 한건, 바로 그와의 결혼 때문이라 책망하며, 최선을 다해 그를 미워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미움을 고사하고 그는 우리가 '괜찮다'라고 해준다는 것이다.
우린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행복하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내 기준의 사랑은 뜨겁고 말랑말랑하며, 달콤하고 진한 무언가였다. 마치 연애할 때의 우리처럼.
그래서 그렇지 않은 신혼을 보낸 것이 억울했고, 분통했다. 만족보다는 후회에 가까운 결혼이라 여겼고, 반복되는 일상은 죽지 못해 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매주 화요일 새벽 지방 출장을 간다. 지난 7년 동안 나는 그가 갈 때 아침거리를 챙겨주고 배웅하기 위해 함께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오늘 나는 실수로 알람 맞추는 것도 깜빡하고 새벽 다섯 시가 다 될 때까지 자버렸다. 눈을 떠 거실로 나와보니 그는 없었고, 나는 그저 미안했다.
그는 분명 나를 깨울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그냥 갔을까?
그리고 나는, 늦잠 잔 김에 더 뻔뻔해질 수 있는데 굳이 왜 미안할까?
아마 그는, 밤마다 우울증 약을 먹고 겨우 잠드는 내가 안쓰러워서 깨우지 않았을 거다.
아마 나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그가 감당해 내는 노고가 존경스러워서 미안한 것일 거다.
여전히 이른 새벽, 어쩌면 내가 틀렸고, 그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말처럼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 아직 나는 분명 우울한데,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격정적인 키스
별도 달도 따줄듯한 달콤한 속삭임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몸부림
비록 이런 불덩이 같은 사랑의 표시들이 잠잠해졌더라도, 우린 서로를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알아낸 게 아닐까? 나의 우울도, 때론 사랑과 감사함 뒤에 숨어도 되는 것 아닐까?
한시라도 더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 이런 미지근한 마음들도, 사랑의 다른 모양임을, 난 언제보다 덤덤하게 느끼고, 곱씹었다.
사랑도 우리와 함께 나이가 들어, 주름이 파이고, 얼룩이 생겼을지언정, 여전히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니 따뜻해진 사랑의 온도에 익숙해져 무지했던 거더라. 우울한 사람은 사랑을 잊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있던 거더라.
미지근한 것 또한 온기임을, 아픈 나를 감싼 책임감도 단단한 사랑임을, 습관 같은 나의 배려도 지독한 사랑임을 기억하자. 우울한 나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임을 위안삼자.
오늘 저녁 밥상 앞에서 티격태격하더라도, 반찬 하나 올려주며 사랑한다 고백해 보자. 어차피 잊힐 미움을 미지근한 사랑으로 위로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