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차리다 사랑을 놓치지 마세요

<세이빙 페이스>

by 지연정반합

<세이빙 페이스>

2004

앨리스 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보수적인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 내에서, 천방지축 엄마와 고집 센 딸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주인공인 윌은 젊고 능력 있는 의사입니다. 매번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사교모임에 나갑니다. 엄마는 윌과 결혼할 남자를 이어주고 싶지만, 윌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되레 그곳에서 마주친 비비안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좀 더 자유롭고 당당한 비비안과 달리 윌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비비안에게 자꾸만 상처를 줍니다. 둘은 엇갈립니다. 한편, 윌의 엄마인 첸은 임신을 합니다. 중년의 나이에, 남편도 없이 임신을 해서 구설수에 오릅니다. 윌과 첸은 다투기도,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갑니다. 첸이 새남편과 결혼식을 하는 날, 윌은 결혼식장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도망칩니다. 윌은 결국 비비안을 잡지 못하고, 비비안은 파리의 무용단으로 떠납니다. 몇 년 후, 사교모임에서 비비안과 윌은 다시 마주치고,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집니다.


영화는 여러가지 관계 구도를 그립니다. 첫번째는 사회와 개인, 두번째는 가족과 나, 세번째는 일과 사랑, 네번째는 나와 나입니다. 사회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작은 관계망으로 시선을 좁혀가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영화지만, 결국은 로맨틱코미디라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터무니없다고, 누군가는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네 가지의 관계구도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구도인 사회와 개인입니다. 캐릭터들은 사회적인 통념과 대립되는 개인적 상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앞서 있는 점은, 사회적 통념과 개인의 대립을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고, 이미 배경으로서, 자연스럽게 설정해 놓는다는 점입니다. 윌은 중국계의 어린 여성이지만, 그러한 이른바 장벽들을 이미 넘어서서 유능한 외과의사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사건으로서 가지고 있는 인물은 윌의 엄마인 첸입니다. 첸은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딸의 친구인 리틀유와 교제하며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습니다. 부모님과 자신의 사회적 위신 때문에 둘의 교제는 비밀리에 진행되고, 결국은 나이와 상황이 비슷한 남자와 재혼을 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갑니다. 클라이맥스인 결혼식 장면에서 이 사실이 밝혀질 때 하객들의 반응은 드라마틱하고 코믹합니다.


두 번째 구도인 가족과 개인입니다. 뉴욕에 살고 있지만, 중국계 커뮤니티는 보수적입니다. 윌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데에는 사회적 통념도 있지만, 엄마의 외면이 더 큰 이유로 작용합니다. 윌이 여자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계속해서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하는 엄마의 행동이, 윌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큰 기제입니다. 엄마인 첸이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데에는 더 윗대의 영향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기 때문에 윌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할머니와 엄마, 딸로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억압이 애틋합니다.


세 번째 구도인 일과 사랑이 있습니다. 일과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윌은 많은 경우에 일을 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비안의 생일 파티에도 가지 못하고, 비비안의 아버지와 똑같이, 꽃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비비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항상 바빴던 아버지와 같은 상황인 윌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의 관계맺음에서 오는 상처의 모양은 반복적이었던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도 윌을 두고 파리의 무용단으로 가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마음 아픈 선택이었는지가 헤아려집니다.


네 번째 구도는 ‘나와 나’입니다. 사실 나와 나의 대립은 다른 모든 대립을 아우르기도 하는 가장 넓고도 가장 좁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쉬운,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갈등의 형태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하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있는 다양한 ‘나’도 있으며, 내면의 ‘나’도 여럿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욕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나’ 사이의 갈등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젠더, 인종, 성적 지향 등 여러 의제를 소재로 사용하면서도 영화 내에서 진지한 논제로 사용하지 않고, 로맨틱 코미디로서 영화의 유쾌한 톤을 잃지 않았던 점에서도, 나의 감정과 욕망이라는 내부의 갈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감독인 앨리스 우는 인터뷰에서 모든 캐릭터가 자기자신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 욕망도, 부모님과 사회에 순응하고 싶은 욕망도, 저항하고 싶은 욕망도 모두 한 몸에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저는 영화를 영화로만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평소보다 깊숙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한 키워드가 된 지도 몇 년이 흘렀습니다. 외부적 기준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욕망을 긍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작은 웃음과 함께 던져준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